올림픽이 끝나니 저녁에 할 일이 없어진 것 같다. 이번 시드니 올림픽은 예전처럼 목을 빼고 기다리면서 TV를 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올림픽 기간동안은 저녁마다 경기 장면을 지켜보곤 했다.
메달 딴 선수들 얼굴이 TV에 클로즈업 될 때마다 새삼 느끼는 것은 그들의 표정이 참으로 인간적이라는 점이다. 지극한 선량함과 인내, 성실이 그 얼굴마다 씌여 있다. 그건 아마도 오랜 시간 자신과의 외로운 싸움을 지나온 흔적들일 것이다.
그런데, 올림픽의 대미를 장식하는 마라톤은 솔직히 김이 좀 샜다. 하루 50 Km씩 뛰면서 열심히 준비했다는 한국의 이봉조 선수가 그만 뒤쳐져 버렸기 때문이다. 마라톤이라는 것이 워낙 저력을 요구하는 일인데, 아직 우리는 그런 저력을 뒷받침할 만한 국민적 역량이 더 필요한 모양이다.
황영조 선수가 스페인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의 감동은 지금도 생생하다. 외출했다 집에 돌아와 TV를 켰더니 황영조 선수의 얼굴이 맨 앞에 나오는 것이었다. 그 마지막 경주 20 여분을 혼자서 신나게 봤다. 황선수가 드디어 맨 앞에서 골인했을 때에는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겅중겅중 뛰기까지 했었다. 그 순간만큼은 마치 우리 나라가 세계 최고가 된 것처럼 더없이 기쁘고 자랑스러웠다.
그런데 며칠 전 신문에 났던 한 마라톤 기사가 내 눈을 끌었다. “청소년들의 고국 방문기금을 모금하기 위해서 허리훈 뉴욕총영사가 뉴욕마라톤에 참가하니 일조를 하고 싶은 사람은 신문에 실린 양식대로 약정금액을 적어서 신청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우선 “청소년들의 고국방문을 위해서”라는 것도 고무적이었던 데다가, “총영사의 마라톤 참가”라는 것 또한 적잖이 흥미로왔다.
마라톤이라는 것이 젊은 사람들도 쉽게 나서지 못하는 운동인데, 허총영사가 어떤 작심을 하고 뛰겠다는 것인지 의문이었다. 코리안 퍼레이드가 있던 날, 우연히 당사자와 조우하면서 나는 궁금증을 풀었다. 허총영사는 자신이 마라톤을 시작한 지가 30년이 된다고 하는 것이었다. 마라톤이 장난이 아닐진대 아무리 기금 모금이 급해도, 장거리 달음박질을 갑자기 하겠다고 나설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매일 연습하세요?”하고 물었더니, “아니, 하루 건너씩 합니다.” 대답하는 그에게서 생기발랄한 소년의 모습을 본다. 마라톤 참가와 관련한 관심에 즐거운 모양이다.
손기정, 황영조, 이봉조 등으로 이어지는 우리의 마라톤, 그것은 사실 그저 건강이나 좀 잘 건져보고자 하는, 남들처럼 여유로운 뜀박질 운동이 아니었다. 험난한 민족사의 고비를 넘기면서 우리에게는 장거리 경주를 해야 하는 힘이 필요했고, 마라톤은 그러한 의미에서 언제나 우리에게 도전이었다. 과연 끝까지 뛸 수 있을까, 얼만큼 성과를 낼 수 있을까 하는 그 질문은 우리 자신의 개인사를 포함한 우리 민족의 삶과 그대로 통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나는 총영사가 자신의 마라톤 참가를 청소년들의 고국방문과 연결시켰다는 점 때문이었는지, 그의 마라톤 참가에서 바로 그 역사와 만나는 느낌을 가졌다.
뉴욕마라톤에 참가하는 그가 힘차게 완주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면서 그 달리기가 우리 모두의 달리기와 하나로 이어지는 일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우리 민족 모두가 함께 미래를 향해 달리는, 그런 아름다움을 꿈꾸고 싶기 때문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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