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어느 날, 카네기홀에서는 아주 특별한 연주회가 열렸다.
유방암 퇴치 기금 마련을 위한 이 날의 행사 중 사회자가 “유방암을 이겨낸 여성은 일어서보라”고 하자 어둡던 객석에 오렌지 빛 등이 연하게 켜지며 내가 앉은 좌석의 앞에서, 바로 뒤에서, 고개를 올려 쳐다본 2, 3층 발코니에서 수많은 여성들이 벌떡 벌떡 일어서는 것이었다.
하나같이 멋진 팔등신 미녀들이었다. 관객들의, 그야말로 우뢰 같은 박수가 쏟아지며 ‘살아있는 모든 것은 아름답다’는 한 문장이 저절로 떠올랐다.
유방암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상징은 연한 핑크빛 리본이다. 그날 수많은 아리따운 여성들, 정장을 입은 남성들의 양복 재킷에는 이 리본이 달려 있었다.
그렇다. 암은 자신에게는 절대로 안 걸릴 것 같지만 어느 날, 갑자기 우리에게, 나에게 찾아온다.
그날, 이 행사를 마련한 사람은 한인 바이얼리니스트 권은숙씨로 그녀는 나이 30세에 유방암에 걸려 지난 6월까지 1년동안 방사선 치료와 화학 치료를 받은 후 건강을 되찾은 여성이었다.
그녀는 치료를 받는 당시 지치고 힘들었지만 불가능한 일은 없다는 신념을 갖게되고 자신이 겪은 일들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젊은 여성과 의료인에게 유방암의 심각성을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수술 후 유방암 생존자를 위한 예술가 모임을 마련하고 그 첫 번째 행사로 자선콘서트를 연 것이다.
우리들은 누구나 그렇다.
‘내가 부자가 되면 자선기관에 도움을 주어야지’, ‘내가 성공하면 신세진 분에게 보답해야지’ , ‘내가 병이 나으면 가난한 자와 아픈 자들을 위한 자원봉사자가 되어야지’ 등등.
그러나 정말 부자가 된 사람은 ‘아직 멀었어. 아직 부자가 아니야’ 하거나 ‘남의 신세는 뭐, 내가 열심히 한 결과지 뭐’ 한다.
병이 말끔히 다 나으면 ‘아프고 고통받던 그 시절을 돌이키고 싶지 않아’, 하거나 ‘내가 그런 적이 있었나’ 하고 애써 기억을 되살리지 않으려고 한다. 구차하고 남루한 기억에서 해방되고 싶어한다.
우리들은 처지가 달라졌다고 과거의 약속쯤은 무시해버리곤 한다.
그리고 또, 지키지 못할 것을 뻔히 알면서 빈 약속을 많이 한다.
어차피 같이 만나 시간을 보낼 것도 아니면서 ‘언제 한번 술 한잔 합시다’, ‘저녁 한번 먹죠.’한다든지 ‘다음 주에 전화 드리지요’ 등등.
사실 다음 주에 전화를 하겠다고 했으면 해야하고 점심을 같이 먹자고 했으면 먹어야 하는 것이 약속이다. 그냥 그 자리를 모면하려고, 별달리 할 말도 없고 해서, 혹은 예의상 헛말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른들에게는 통용되는 이 빈말이 이곳에서 교육받는 1.5세나 2세들에게는 통하지 않는 것을 본다.
“아빠가 약속했잖아. 다음 주에 영화 보러 가자고, 아빠는 거짓말장이야.”
“고등학교 가면 새 컴퓨터 사준다고 했는데 왜 약속 안 지키세요” 하며 따지고 들 때 황당해진 부모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응석부리는 줄 알고 긍정적 대답을 한 것이 기억날 것이다. 부모는 잊어버려도 아이에게는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약속인 것이다.
미국 제도는 거짓말을 싫어한다. 만일 사정이 생겼으면 솔직하게 그 형편을 이야기하면 들어주는 합리적인 면이 있다. 차라리 변명을 하면 통해도 아주 작은 거짓말도 통하지 않는 것이다.
미국에 사는 우리 한인들은 생활 현장에서, 이웃과의 대화에서 사소한 것이라고 약속을 남발하는 것은 아닌지. 아무리 작고 하찮은 것이라도 지켜지지 않은 약속은 거짓말이 된다.
한달 전의 콘서트처럼 ‘지켜진 약속’을 보면 나 자신 해이해진 마음을 다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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