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칼럼
▶ 전효숙 (윌셔연합감리교회 지휘자)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 보다 오래 살아 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아, 내 몸이 창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고 느끼는 순간, 섬뜩한 기분이 온 몸을 감싸고 찬 기운이 몰려왔다. 아득히 추락하는 듯한 느낌 속에서 눈을 뜨니 몸이 이불 밖으로 반쯤 나와 있다. 언제 아침녘이 이렇게 서늘해졌던가? 이런 꿈을 꾸는 게 벌써 며칠 째이다.
글 예쁘게 잘 쓴다는 감언 이설에 넘어가 원고 약속을 덜렁 해 버린 게 실수였다. 정 기자로부터 전화만 걸려 오면 이젠 가슴부터 철렁 내려앉아 빚쟁이 피해 도망 다니는 꼴이 됐다. 원고 독촉을 받고, 밤새도록 책상에 앉아 있었지만, 한 줄도 쓸 수가 없었다. 수십 번 반복되는 가미가제식 테러 장면을 들여다보며 그저 황망하고 우울할 뿐이었다. 아무 것도 손에 잡지 못한 나의 황망함은 무력감 그 자체였다.
이런 기분은 나만 느꼈던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도르노라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철학자가 했다는 "아우슈비츠의 유대인 학살 이후 서정시란 불가능하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말도 안되는 그 죽음과 부조리 앞에서 도대체 누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애통해 하는 뉴요커들의 슬픔에 대해 나는 겨우 손수건 한 장으로 감당할 수 있는 눈물밖에는 달리 나눌 수 있는 게 없었다. 죽음, 재앙, 공포, 지옥, 저주, 슬픔 . . . 아, 떠올리고 싶지 않은 단어들이 머리 속을 채우고 나를 가만 두지 않는다.
합창단원 최선숙씨의 남편이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도 이 때였다. 그렇게 일찍 떠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터인지라,hyosuk/sorrow
가슴 한 쪽이 미어지듯 아파 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 따뜻하고 착한 여자에게 하루아침에 검은 베옷으로 갈아입고 눈물을 삼키라고 명령한 자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러나, 덜 아픈 자의 특권이라도 되는 양, 남은 자에게 어떻게 위로의 말을 전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는 내 자신이 미워졌다. 나는 내가 왜 "운이 좋은지," 내가 왜 "강한 자"인지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세계의 한 쪽에 삶이 있다. 그러나 다른 한 쪽에는 죽음이 있다. 살아남은 이들은 비통함에 눈물을 흘리지만, 죽은 이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안식 속에 머문다.
나는 가브리엘 포레의 "레퀴엠"을 찾았다. 대부분의 진혼곡들이 죽음의 애통함과 심판의 공포를 묘사하고 있지만, 유독 포레의 곡만은 두려움이 그다지 비치지 않는, 오히려 낙원의 정경과도 같이 평화로운 곡상을 전개시키고 있다.
신비감이 들만큼 정교한 앙상블이다. 특히 "리베라 메"(우리를 구하소서)에서 바리톤이 무겁게 선포하는 듯 외치면, 금관 연주와 함께 합창이 "저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라고 <포르테 시모>로 응창을 한다. 여기에 이르면, 나는 목놓아 통곡하지 않을 수가 없다. 속이 후련할 만큼 울고 나면, 들먹거리는 어깨 위로 천사가 내려와 현악기의 선율로 손을 얹는다. 마치 어두운 밤의 가위눌림에서 깨어나 평온한 아침을 맞이하는 것 같다.
나는 이번 주 예배에 포레의 "평화의 기도"를 찬양 곡으로 택할 것이다. 아직은 "남의 일"인 이 죽음들이 나에게 슬픔과 분노를 가져다주었다면, 그 슬픔과 분노는 죄 없이 죽어 갈 또 다른 아프가니스탄의 민간인들, 지금 이 순간에도 죄 없이 죽어 가는 지구상의 모든 존재들에 대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 앞에 무슨 논리와 합리성이 있는지 나는 모른다. 그저 살아 남았다는데 대한 슬픔과 미안함이 있을 뿐이다. 탄저균이 가져다주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더욱 겸손히 내면의 피난처를 찾는 것밖에 또 무엇이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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