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가 나눔의 부족인 것 같다. 모두가 개인 이기주의와 집단 이기주의 속에 나의 것 우리의 것을 쟁취하고 지키기 위하여 투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쟁취와 지킴보다는 나눔과 베품이 있는 곳에 기쁨과 사랑이 있다. 내 이웃에게 나의 것을, 우리의 것을 나눈다는 것은 얼마나 뜻 있고 기쁨 있는 일인가? 그것이 가난한 이웃일 때 더욱 그 의미를 더 하는 것 같다.
우리는 흔히 봉사를 통해서 봉사자가 타인에게 도움과 기쁨을 부여함을 감사하고 칭송한다. 그러나 우리는 나눔을 실천하는 봉사자 자신에게도 주는 것 이상의 기쁨과 축복이 주어짐을 잘 알고 있다.
나눔의 진리는 오랜 역사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 같다. 역사는 몇 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가진 자가 나누어야 함이 진리임을 역설하고 있다. ‘제국의 아침’이라는 연속극에서 고려의 광종은 “노비 안건법”을 시행하면서 신료들이 가진 것을 내놓아야 하며 그래야 국가가 편안하다고 일갈한다. 황제가 자신의 권력유지를 위하여 시행을 했든 신료들이 황제의 권위에 눌려 시행했든 가진 자들의 나눔은 노비들의 자유라는 원천적인 인간 권리의 획득을 통해서 가장 고통받고 소외 됐던 사람들에게 평화와 자유를 부여한 것이다.
하느님이 한 처음에 인간에게 주신 최초의 은총과 사랑은 “평화와 자유”다. 성서 ‘출애굽기’에서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배고픔에 울부짖을 때 만나를 내려 주시며 “백성들은 날마다 나가서 하루 먹을 것만 거두어 드리게 하여라”라고 하신다. 먹고 남는 것을 그 다음날을 위해서 남겨 두지 말라고 하신다.
왜 그랬을까? 하느님은 나눔을 이야기하고 계신다. 내가 내일을 위해 하나를 더 가져온다면 그 하나를 어느 한사람은 잊어버려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내가 하나를 더 가질 때 ‘그것에는 구더기가 끓고 썩는 냄새가 날 것’이라고 성서는 전하고 있다.
과연 우리들은 내가 좀 더 많은 것, 좀 더 좋은 것을 갖기 위하여 혹시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과 불이익이라는 구더기와 썩는 냄새를 피우고 있지는 않은지, 아니 나의 이웃 형제자매들에게 하느님의 계명인 사랑의 전달을 소홀히 하고 있지는 않은지 곰곰이 생각해보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내가 소유한 것을 가난으로 고통받는 사람들과 나누자고 호소하는 사람들에게 ‘나만의 소유’를 주장하고 고집하고 있지는 않은가, 혹은 나는 가난에 고통받고 힘들어하며 소외된 사람들을 위하여 침묵하고 있지는 않은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하면 이 글을 쓰는 나 자신부터 부끄럽고 송구스러워 글을 중단하고 싶은 마음 금할 길 없다. 아는 척 하면서 지금까지 실천하지 못했음이 매우 부끄럽기 때문이다. 이럴 때 기도로 하느님께 청해야 되나보다.
하느님께 우리 주위의 많은 가난에 고통받고 병들어 고통받는 사람과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서 나부터 행동할 수 있는 용기와 힘과 지혜를 주시기를 기도한다.
김 태 극
<정의로운 경제를 위한 성직자와 평신도 연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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