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이 내 고향 신의주 소식이 신문에 자주 나오고 있다. 신의주의 도시 모습이 TV 화면에 비춰지면 나는 가슴이 뛴다. 내가 다닌 소학교나 신의주 남고녀(南高女)가 나올지도 몰라.
자리를 뜨지 못하고 화면을 지키다가 그렇게도 신의주에 가보고 싶다고 하신 어머니가 몇 해만 더 사셨더라도 모시고 갈 수 있었을 터인데 하고 가슴이 저려오기도 했다.
너무 오래 인내하였구나. 기다리면 때가 오긴 오는가 보다. 그러나 사람의 생명이야 어디 시간을 기다려 준다던가. 생전에 한 번만이라도 고향에 가보고 싶다던 많은 분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중학교 2학년 때 부모 따라 월남한 나도 ‘新義州’라는 활자만 보아도 화들짝 뛸 정도로 반갑고 그립다.
그리운 신의주... 소리 없이 내린 함박눈으로 오밤중에도 대낮같이 밝은 천지. 설빔을 짓는 엄매(엄마) 곁에서 화로 재를 가지고 놀며 듣던 이야기.
“ 네 둘째 이모가 태어날 때는...”
내 둘째 이모는 국가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참으로 어려울 때 태어나셨다. 일본순경들이 독립군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있을 때이고 내 외조부가 독립군에 자금을 대었다해서 미결수로 평양감옥에 투옥된 때였으니. 그런 어려운 때에 이모는 부엌에서 태어났다. 물을 데우며 노 할머니는 부엌바닥이 뚫린 만큼 한숨을 쉬며 “고작 에미나이 새끼나 낳느라고. 애비가 가막소에 있는 것도 모르는 색갱이를. 쯧쯧쯧.” 하며 눈물을 흘리셨다.
아홉 달 만에 풀려나 돌아오신 외조부는 갓 태어난 애기에게 눈 한 번 주지도 않으셨다. 외할머니도 때를 가리지 않고 딸을 낳은 죄가 태산같고 부끄러워서 젖을 물리기도 꺼리셨는데 “글쎄, 하루에도 와이셔츠를 두 세 번씩 갈아입으며 일본말만 쓰던 일본유학생 이모부는 여자를 바꾸다가 그나마 어떤 여자 집에서 일찍 가셨어. 그래서 한 평생을 주님 붙잡고 우리 집에서 사셨지 않니.”
어머니가 어린 나에게 아무 말은 안 하셨어도 층층시하에서 불행한 친정동생을 항상 옆에 끼고 사신 어려움이 오죽 컸을까 짐작이 간다.
“외숙이 의주사범에 다닐 때 입쌀은 팔아 학비로 대고 식구들은 조밥만 먹었단다. 그래도 외삼촌은 우리 집안과 온 동리의 자랑이었어.”
외숙은 좀 걸어서 압록강 사잇강으로 가 뗏목이 풀려서 흘러흘러 강기슭에 떠 있는 통나무를 타고 의주로 내려가곤 했다. 풍채 좋고 활달했던 외숙은 가끔 신의주에 내려오시면 나에게 로시아 사탕을 사 주셨고 어느 해인가는 ‘아편전쟁’이라는 영화도 보여 주셨다.
그런 멋쟁이 외숙이 62.5 동란 때 행방불명이 되셨다. 아버지를 닮아 너무나도 잘생기고 공부도 잘한 내 사촌도 아버지를 찾아본다고 나간 채 소식이 없다가 몇 해 전에 아들이 양강도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양 죽지에 날개가 달린 듯 양강도에 달려간 작은 아들은 형님이 월남가족으로 고생하다 오래 전에 세상을 떴다는 슬픈 소식만 확인하고 돌아왔다. 가슴에 말뚝 같은 못을 박은 채 올 봄에 외숙모도 세상을 떠나셨다.
10월에 딸아이가 금강산에 간다고 하며 엄마도 가시겠느냐고 물었다. 시월의 금강산이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그러나 배타고 갔다가 금강산 보고 토끼같이 그 길로 쪼르르 돌아오는 그런 관광은 싫구나. 너에게는 좋은 기회니 갔다오너라. 특구가 제대로 되면 나는 겨울을 넘기고 새 봄에 신의주에 갈거야.
뜰 앞의 볼품 없이 큰 단풍잎이 와삭거리며 떨어진다. 시간을 붙들어매고픈 마음이 인제는 없어졌다. 고향 땅을 밟을 새 봄이 빨리 왔으면 해서이다.
정옥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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