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어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 어라”
1946년 발표된 이 시는 시인이 스무 살 때인 1941년 일제가 창씨 개명의 강도를 높이자 속세를 버리고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를 들어가 장발에 장삼을 걸친 채 중 아닌 중이 되어 동승들을 가르치며 은둔하고 있을 때 쓰여졌다. 이 시속에는 자연의 섭리와 무상, 우아한 자세, 한 발 물러나 세상을 바라보는 관조미가 녹아 있다.
한동안 묻혀있던 이 시가 이번에 구속된 한국의 박지원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인해 세상에 다시 빛을 발하게 된 것은 아이러니다. 이 시를 썼던 시인과 그 가족들에게 북한의 독재자 김일성 부자가 가했던 한 많은 사건들(공산당의 시달림으로 자결한 시인의 조부, 제헌 국회의원이던 시인의 부친, 서울대 교수였던 시인의 매부가 그들에게 납북 당해 생이별하다 돌아가셨거나 생사를 모름)과 돈주고 산 남북정상회담 성사에 무한한 자부심을 느꼈던 박지원씨, 사석에서 거나하게 취하면 정상회담 얘기를 털어놓는 게 한동안 낙이었다던 그 김정일과 서로 팔을 끼고 술잔을 비우는 ‘러브 샷’을 하고 고별 오찬에서 “내 곁에 있어 주”를 부르며 애교를 떤 덕에 받은 앵콜로 “우린 너무 쉽게 헤어졌어요”를 불렀다는 그.
전 대통령의 명예욕과 영웅심을 부추기던 모사꾼, 권력지향 정치인으로 국민을 속이고 직장에서 군자금을 전하고도 단돈 1달러도 준 적이 없다던 그, 김정일을 화통한 인물로 소개했던 그의 이미지는 시속에 녹아있는 ‘낙화’의 마음과 자세와는 거리가 멀다.
떠나는 자신을 미화시키려는 재치가 놀랍긴 하지만 시 한 줄의 인용이, 순간적 재치가 소멸을 아름답게 해 주는 건 아니어 오히려 비난의 대상이 된 것은 그의 이미지가 시인의 그것과 소위 ‘코드’가 맞지 않았던 때문이다.
조지훈은 ‘승무’의 저자이며 청록파시인 중 한 사람이라는 게 일반적인 인식이지만 그는 4.19 혁명의 불꽃을 지피고 추상과 같은 질책으로 지조 있는 삶을 외친 논객이요 한국인의 민족 문화사를 재정립한 민속학자다.
일제시대 이후 험난한 역사적 현실아래 선비의 지조와 열정을 지니고 살아온 조지훈은 이 시대가 요구하는 지성인의 소명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인물이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꿋꿋한 기개와 지조를 보여주었던 조지훈의 삶을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원형으로서 제시하면서 그의 삶을 체험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세워진 ‘지훈 기념관 건립계획안’을 승인, 지원한 정부부처의 수장이었던 박지원씨가 자신의 처지를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선택했던 이 시로 인해 비난을 받을 줄 어찌 알았겠는가.
권불십년이 아니라 권불오년이다. 바야흐로 새 정부 출범 후 신당 문제로 시끄러운 한국 정치판에 과거 박지원씨를 부러워하던 뉴욕의 언론인과 한인사회 인사들이 뛰어들고 있다. 제 2의 박씨가 더 이상 나오지 않길 바란다.
조광열/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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