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한 왕조를 창건한 유방은 신하들이 시경을 들먹거리면서 정치를 이렇게 해야 한다느니 저렇게 해야 한다느니 하는 충고가 지겨워 하루는 “나는 말을 타고 이 나라를 정복했노라” 하고 선비 출신 신하들을 비꼬았다. 시경 같은 것 모르는 내가 천하통일을 했는데 왜 말들이 많으냐는 뜻이었다. 그때 신하가 말하기를 “말 위에서 세상을 정복할 수는 있지만 말 위에서 세상을 다스릴 수는 없는 법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크게 깨우쳐 “그래 네 말이 맞다”며 신하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정복한다는 것과 다스린다는 것은 다르다. 선거에서도 이긴다는 것과 정치 잘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노무현 대통령이 지금 그 시련을 겪고 있다.
부시 대통령이 요즘 진퇴유곡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시련도 바로 말 위에서 세상을 정복한 다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른 데서 온 비극이다. 매일 미군이 이라크에서 한두명씩 죽어 나가고 있다. TV에서 미군이 피살되었다는 뉴스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진다. 이대로 가면 이라크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날지도 모르고, 그렇게 되면 미군은 정당방위를 위해 폭동 군중에게 발포하게 될 것이다. 그 다음 문제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미국이 35년 독재자를 제거해 주었는데 이라크 국민들은 고마워하기는커녕 이를 악물고 미군을 죽이려 하고 있으니 말이다. 후세인 동상이 끌어져 내릴 때 거리에 뛰쳐나와 열광하며 미군을 환영하던 군중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며칠 전 바그다드에서 미군 1명이 순찰 도중 피살되었다. 그런데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 다음 장면이다. 성난 군중들이 미군 지프차에 올라가 커버를 찢으며 미친 듯이 미국 성토 구호를 외쳐대는 것이었다. 살기가 등등했다.
지난 5월1일 항공모함 링컨호 함상에서 ‘Mission Accomplished’라고 쓰여진 배너 밑에서 부시는 “이제 주요 전투는 다 끝났다”며 승리선언을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부시는 정말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린 것 같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이라크 주요 도시에는 지금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 발전소에서부터 전선주에 이르기까지 모두 파괴되거나 도둑맞아 보수작업에 엄청난 인원과 경비가 든다. 그런데 미군에 협조하는 시민들에 대해 테러를 하기 때문에 아무도 선뜻 나서지를 않는다.
뿐만 아니다.
석유를 생산한다는 나라에서 개솔린을 구하기 힘들어 주유소마다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물도 모자라고, 생필품도 구하기 힘들고, 경제는 엉망이고, 군인들은 고향에 돌아왔으나 모두 실업자 신세고, 학교도 휴교 중이며, 치안이 확보되지 않아 도둑이 판을 치고 있다. 이러니 “미군이 진주한 후 모든 것이 최악이다. 후세인 시대가 차라리 좋았다”는 소리가 안 나올 수가 없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후세인이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보복이 두려워 이라크인들이 미군에 협조하기를 꺼려한다는 사실이다. “미군에 협조하면 죽는다”는 낙서가 시내 곳곳에 쓰여져 있는데도 감히 누가 나서서 지우는 사람이 없다.
미군은 바그다드에 진격할 때 치안유지 대책도 함께 강구했어야 했다. 특히 박물관에 난입하여 도둑들이 귀중한 미술품을 가져가도록 내버려둔 것은 미군 이미지에 먹칠을 해 놓았다. 더욱이 도둑들은 모든 관청에서 전깃줄까지 빼가 행정을 다시 시작하기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이와 같은 이라크의 사회전반에 걸친 마비현상을 정상화시키는데 1주일에 10억달러가 들어간다. 얼마 전까지 흑자였던 미국예산은 지금 4,550억달러 적자를 보이고 있다.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이래가지고는 부시가 내년 선거에서 재선된다는 보장이 없다. 미국인들은 월남전 악몽을 다시 떠올리고 있다. 말 위에서 세상을 정복할 수는 있으나 말 위에서 다스릴 수는 없는 법이다. 이기는 것과 다스린다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이철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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