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 데이비스 주지사가 캘리포니아 사상 처음으로 소환투표에 회부된다.
현재의 분위기로 보아 10월7일에 치러질 소환투표에서 그가 살아남을 확률은 30~40% 정도다. 표면적으론 ‘축출’ 분위기가 지배적이지만 실제 속사정은 겉보기와는 달리 그리 간단치가 않다.
20%대 초반의 참담한 지지율을 기록중인 그를 주지사 관저에 계속 머물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내년의 대선과 총선에서 자당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공화당 내부의 정치적 판단과, 현재와 같은 총체적 난국에 확실한 대안 없이 사공을 교체할 경우 풍랑에 휩싸인 가주 경제가 아예 침몰할수도 있다 는 유권자들의 우려가 절묘하게 맞물린다 면 데이비스는 퇴출의 수모를 모면할 수도 있다.
실제로 몇몇 공화당 인사들은 데이비스의 소환 캠페인이 구심점을 잃고 표류중인 민주당을 자극, 당원들과 지지자들의 결속력을 높이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며 그의 축출 노력을 저지하기 위해 역 서명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경쟁관계에 있는 상대 진영이 ‘적장’을 애써 보호하려는 진풍경을 연출한 셈이다.
더구나 공화당은 데이비스가 쫓겨나고 그의 자리를 유능하고 인기 있는 민주당 정치인이 꿰찰 경우 공연스레 “남 좋은 일”을 시키는 꼴이 되고 만다는 계산까지 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데이비스 퇴출로 민주당이 실익을 얻고 공화당은 오히려 큰 손해를 보게 된다는 것.
게다가 공화당 후보로 거론되는 인물들도 영 시원찮다. 데이비스 소환운동을 주도하고 자금을 댄 대럴 아이사 연방하원의원은 사기혐의로 체포된 경력을 갖고 있고, 오스트리아의 바디빌더 출신인 영화배우 아놀드 슈워즈네거는 영어 발음조차 신통치 못한 정치 문외한이다.
백악관 안보수석으로 한창 잘나가는 콘돌리자 라이스가 가주 주지사직에 관심을 표명한 적이 있긴 하지만 ‘물좋은’ 백악관을 박차고 나와 설거지감이 산더미처럼 쌓인 캘리포니아로 내려올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설사 당선된다 해도 숱한 난제들과 씨름을 해야 하고, 제한된 시간내에 가시적 성과를 올리지 못할 경우 정치적 타격을 입게 되는 자리를 두고 부시의 오른팔이라는 그녀가 굳이 모험을 감행할 이유가 없다.
이처럼 복잡하게 꼬인 상황으로 인해 데이비스가 관저를 유지할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으나 소환투표 결과에 상관없이 그의 정치생명은 이미 끝장이 났다고 보아 무방하다.
정치인이건 사업가건 한번 무너진 믿음을 다시 쌓으려면 백지상태에서 크레딧을 새로 쌓는 것보다 몇 곱절이나 더 많은 공력을 들여야 한다. 우선 믿음이 허물어진 자리에 들어선 불신의 벽부터 뜯어내야 하는데 그것 자체가 흰색 도화지에 엎지러진 먹물을 말끔히 지워내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많은 사람들은 데이비스의 정치적 몰락을 가주 사상 최대규모의 재정적자와 연관지어 생각한다. 닷컴 붐으로 덤처럼 얻은 풍요로운 살림을 거덜낸 것만도 부족해 연이은 판단착오로 캘리포니아를 연방편입 이래 최대의 빚더미 속으로 몰아 넣었으니 유권자들의 신뢰를 잃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는 시각이다.
물론 데이비스는 억울하다고 항변한다. 닷컴의 거품붕괴는 불가항력이었고, 재정적자를 악화시키는데 결정적으로 힘을 보탠 에너지 파동도 따지고 보면 전임자인 공화당출신의 피트 윌슨이 전력가격 규제를 해제한데 따른 부작용이었음에도 그 책임을 온통 주지사에게 뒤집어 씌우는 것은 온당치 않다는 주장이다.
그는 23일 가진 기자회견에서도 소환에 저항해 “벵갈 호랑이처럼 맹렬히 싸우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진작 그런 각오와 기세로 업무에 임했다면 아마도 지금 그가 직면한 정치적 위기는 피할수 있었을지 모른다. 유권자들의 실망과 분노를 촉발시킨 것은 불가피한 상황 그 자체가 아니라 상황에 대처하는 지도력의 부재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그는 벵갈 호랑이가 멸종 위기에 몰린 사실 역시 몰랐던 모양이다. 아니면 자신의 정치적 소멸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었을까.
이강규<국제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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