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 선배를 처음 만난 건 1973년 3월 환경위생 교수님 실험실이었다. 2학년 본과 개강식 날 몇 명의 고향 동기생들과 실험실 앞 잔디밭으로 모이라는 원인 모를 통지를 받고 참석을 했다. 약대 선배로 보이는 2명이 나오더니 나와 또 한 명만을 지명한 후 따라 오라 하여 영문도 모르고 따라간 곳이 교수님 실험실이었다.
수많은 종류의 유리실험기구들과 실험용 산(acid)들, 보조기구들이 풍기는 야릇한 실험실 분위기를 채 느끼기도 전에 실험기구들을 말끔히 세척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화창한 봄날 날벼락도 유분수지 하며 우리는 실험기구 세척을 시작해야만 했다. 선배들로 보이는 몇 명이 교수님 집무실 앞 응접세트에서 즐거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우리는 단 한 점의 티끌도 있어서는 안 되는 실험기구 세척을 계속해야만 했다.
얼마 후 교수님께 인사를 드리고 난 후에야 이 실험실은 인천 출신 약대생들만이 가입할 수 있는 전통 있고 지방색 짙은 모임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모임의 최고 고참이던 그 선배는 PPT(침체물: 실험실 용어로 낙제라는 뜻으로도 쓰임) 2년, 군대갔다 온 복학생이며, 결혼해 아이가 하나 있으며 부친은 교육감이었다.
그 선배는 뜻(?)한 바 있어 학교 주변에 하숙을 정하고 학교 공부와 약사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어느 날 하숙집에 젊은 여자가 아장아장 걷는 아기를 데리고 들어왔다. 아이가 하도 아빠를 보고싶어해서 데리고 왔다는 것이다. 선배는 장난기 많은 후배들의 간절한 합방 권유를 뒤로한 채 아이를 안고 부인을 버스정류장까지 배웅 나갔다.
우리들은 곧바로 하숙집 부엌에다 김치말이 생두부 안주에다 소주를 준비한 후 벽을 향해 앉아 책읽기에 몰두한 척하고 있었다. 교육감 집 학생아들에게 어린 나이에 시집온 젊은 아낙은 아이 핑계를 대고 ‘한양’서 공부하는 남편을 만나고자 가슴 설레며 80리 길을 왔건만 대학을 8년째 다니고도 졸업이 언제인지도 모르는 대학생 남편은 무정하게도 당일로 부인을 고향으로 내려보내고 다시 하숙집으로 홀로 돌아 왔다.
숨죽이고 책상머리에 앉아 책읽기에 몰두하고 있는 후배들에게 집합명령이 떨어졌다. 순식간에 김치말이 생두부 안주에 사발마다 소주가 넘쳐흐르고, 요사이는 보기도 힘든 찌그러진 양은냄비와 하도 두드려 모서리가 닳아 버린 밥상머리에 젓가락 타악기가 신명나게 울려 퍼질 때, 숟가락 마이크를 잡은 그 선배는 경인선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내려가는 어여쁜 부인과 아기를 그리며 구성지게 한 곡 뽑았다.
산에는 진달래 들엔 개나리, 엄마구름 애기 구름 정답게 가는데, 아빠는 어디 갔나 어디서 살고 있나, 길 잃은 기러기 30년 전 기러기 아빠, 그 선배는 30년 후 요즈음 또 다른 사연의 수많은 기러기 아빠 후배들을 어떤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을지.
마이클 강/가든그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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