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상/수필가
모처럼 한국에 나간 K씨는 동창모임이 있다기에 약속 장소인 식당으로 갔다. 입구의 한 무리 노인들을 피해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너 아무개 아냐. 돌아보니 노인들은 모두가 몇 십 년만에 만나는 초등학교 동창들이었다.
나도 서울행 비행기를 탈 때면 정확한 내 나이를 계산해 보곤 한다. 운전하던 친구는 압구정동을 지나면서 30대도 소외되는 곳이니 내릴 생각은 말고 그냥 차창 밖을 바라보라고 했다. 밖의 젊은이들 물결은 아주 먼 나라처럼 느껴졌다.
나이 먹기란 사람들이 그렇게 정했을 뿐이지 사실은 꽃이 피고 지고, 개가 태어나서 늙어가듯 세월의 흐름일 뿐이다. 칼로 베듯 만든 나이는 사회의 질서와 서열을 지키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아닐까. 그리고 나이는 내가 먹는 것인데 그것이 철저히 남들에 의해 평가되고 무시되는 것은 좀 생각해 볼 문제다.
꽃은 현란하게 피었다가 시들면 새 꽃이 다시 피어나고, 인간이 태어나 늙으면 새 생명이 그 뒤를 잇는 것은 만물의 순환 이치다. 때문에 우리의 선배들은 자신들을 태어나게 하고 키워준 부모를 존경하고 보살폈고, 사회생활을 이끌어준 이웃 어른들을 극진히 예우했다. 나이 먹는다 것이 당당하고 권위 있던 시대는 가고 늙음을 숨기려는 시대가 되었다.
머리를 검게 염색한 80대 한국 대통령과 흰머리의 50대 미국 대통령이 같이 찍은 사진을 보면, 동서가 나이에 대한 시각이 선명히 드러난다. 도덕을 근본으로 하는 동방 예의지국이 로마 멸망의 한 원인제공이었던 노인경시 풍조를 따르는가 하면, 서양에서는 오히려 법률적 보호장치로나마 국가에서 노인들을 책임지고 챙겨주고, 사회생활에서도 나이에 관계없이 각자 능력에 따라 젊은이들과 똑같은 평가와 권리를 누리고 있다.
LA에 사는 내 동창은 학벌은 별로 인데 미국 굴지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젊은 백인들이 줄줄이 해고당해도 그는 아들딸 장가보낸 지금도 그 회사를 잘 다니고 있다. 나이를 먹는 것은 사적인 문제다.
30년 전 신문에서는 노인회원 자격이 50세였다. 엊그제 L씨가 다니는 교회 노인회로부터 자동가입 통보를 받았다. 자기가 왜 노인이냐고 펄쩍 뛰었다. 뛸 만도 하다. 65세인 그는 젊은이보다 골프 샷 거리도 더나가고 자영업을 잘해 미국 회사들이 항상 경험 있는 그를 찾고, 사랑이라는 보약으로 챙겨주는 아내 덕분에 그는 언제나 명랑하고 힘이 넘친다. 시인은 한편의 시를 쓰는 것과 함께 태어나고 그 시를 쓰고 나서 함께 죽는 일을 반복하는 존재라고 한다. 그렇게 정신적 행복의 소중함을 견지했으면 좋겠다.
더 나이 들면 김재식(80)옹처럼 살아보자. 도지사, 국회의원을 지낸 그는 11년 전 70세가 되자 도시에서 무의 도식하는 것이 죄스럽고, 일본군 장교를 지낸 과거를 속죄하는 마음으로 고향 장성 마을로 내려가 처음에는 400평의 논을 빌려 직접 농사를 진다. 힘들게 일본 볍씨를 구해 30여종의 신품종을 개량하여 농민들의 생활을 개선시켜 나간다. 농사 공부도 열심이며 농민 강의에도 바쁘다.
구순이 되면, 송년에서의 글처럼 피천득(93) 선생을 닮자. 애욕과 번뇌, 실망에서 해탈하는 것도 적지 않은 축복이다. 기쁨과 슬픔을 많이 겪고 난 뒤에 맑고 침착한 눈으로 인생을 관조하는 것도 좋은 일이다. 여기에 회상이니 추억이니 하는 것을 계산에 넣으면 늙음도 괜찮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