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재경<국제회의 통역사>
미국 내 극장에서 개봉되기 전부터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마이클 무어 감독의 다큐멘터리 “화씨 9/11”(원제 “Fahrenheit 9/11”)을 개봉 며칠 후에 보았다. 프랑스에서 열린 제 57 회 칸 영화제에서 무어 감독은 이 영화로 영예의 황금종려상도 수상했건만 논쟁의 여지가 충분히 있는데다가, 보수파들이 보이콧하고자 했던 영화라, 미국내 배급사가 없어 빛을 못 볼 뻔했던 영화이기도 하다. 다행히 캐나다의 독립 스튜디오인 Lions Gate 엔터테인먼트가 배급사가 되어 개봉한 지 3일 만에 2천3백 90만 달러라는 다큐멘터리로서는 기록적인 흥행수입을 거두었다.
특히 여름철에 선보이는 영화들을 포함해서 헐리우드 영화들은 대체로 영화 관람 후 극장문을 나서기가 무섭게 “제목이 뭐였더라”할 정도로 금방 희미해지고, 기억에 남을 만한 주제나 무게를 담고 있지 못하다. 헐리우드 영화의 대부분이 관객들에게 생각할 기회를 주지 않고, 주제 역시 부시 대통령 같은 사람들이나 믿는 단순한 흑백론적 세계관이나 권선징악만을 담고 있기에 1.3%의 괜찮은 헐리우드 영화가 나머지 98.7%를 먹여 살린다는 말도 아마 이런 배경에서 나왔을 터이다. 하지만 “화씨 9/11”은 물론 무어의 주관에 치우친 정치적인 다큐멘터리이긴 하지만 많은 것을 생각케 만드는 신선한 영화였다.
“화씨 9/11”을 통해 무어는 2000년 대선 때 대통령 자리를 빼앗은 부시 및 그의 일가와 사우디 왕가, 그리고 오사마 빈라덴 일가 사이의 우정과 그 우정이 맺어지기 전에 시작되었던 사업 관계, 9/11 사태 이후의 본토 방어 목적으로 제정된 이름도 희한한 “애국법,” 대량살상무기의 존재 여부도 확인하지 않고 이라크를 공격한 사실 등을 보여주려 했다. 미의회 의원들이 수많은 사람들의 인권을 박탈할 수 있는 “애국법”을 통과시키기 전에 그 내용을 아무도 읽지 않았다는 사실은 단순히 충격을 넘어 엄청난 실망감을 내게 안겨 주었다.
이라크 전쟁에서 아들을 잃은 어떤 엄마는 이 영화에서 아들의 희생에 대해 당연히 의문을 제기한다. 무어 역시 미 의회 의원들에게 그들이 승인한 전쟁에 왜 그들의 아들들을 보내지 않느냐는 가차없는 질문을 던진다. 이와 달리 국군 모집원들은 ‘좋은 기회를 제공하는 직업 군인의 길을 왜 마다하느냐’고 빈곤한 지역의 고등학생들에게 묻는다. 이외에도 “화씨 9/11”은 시원한 답을 기대할 수도, 줄 수도 없는 많은 질문들을 던진다.
무어는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교사 1명 포함 13명 피살)을 소재로 한 영화(“Bowling for Columbine”)로 아카데미 최고 다큐멘터리 상을 수상한 후, 그 소감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우리는 허구의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허구의 선거를 통해 허구적인 대통령을 선출한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허구적인 이유로 우리를 전쟁에 내보내는 그런 인물이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 미스터 부시 부끄러운 줄 아시오. 부끄러운 줄 아시오.” 그의 소감에 “화씨 9/11”에서 던져진 수많은 질문들에 대한 답이 함축되어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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