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자영 부행장은 “지난 24년 동안 한 직장에서 욕심 부리지 않고 최선을 다해 일해왔다”며 “지속적으로 한인사회를 위한 봉사활동을 펼칠 것”이라고 말했다.
초대석 박자영 뱅크 오브 아메리카 부행장
뱅크 오브 아메리카의 박자영 우대고객 담당 부행장은 한인으로 이 은행의 가장 높은 직위에 오른 전문 경영인이다. 뱅크 오브 아메리카는 자산 1조372억200만달러 규모의 미 전국 2위의 거대은행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이민와 UCLA 졸업 후 BOA 입사 20년만에 소수계 여성으로서 숱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고 미 주류은행의 우대고객 담당 부행장에 오른 그녀가 다루는 우대고객만 8,000여명에 연간 액수만도 280억달러가 넘는다. 그녀의 오늘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려는 마음과 청렴함, 소수계 직원 권익옹호에 힘쓰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81년 입사후 지점장 등 거치며 능력 인정받아
LA폭동때 복구자금 파격 대출 재기에 한몫
“돈·지위가 목표 아니다… 은퇴후 봉사활동할 것”
■ 또순이 박자영
지난 74년 고등학교 2학년 때 이민온 박자영 부행장은 LA 하이스쿨에 다시 입학했다. 이민온지 2주 후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그녀는 주중에 핫도그 샵에서, 주말에 흑인 운영식당에서 일하며 용돈을 벌었다. 다섯 자매 가운데 둘째인 그녀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었던 부모님에게 용돈을 달라는 말이 도저히 떨어지지 않아 매일같이 아르바이트를 했다.
UCLA에 입학한 그녀가 처음에 택한 전공은 약학. 화학과목을 수강하면서 자신의 적성과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3학년 때 전공을 경제(Business/Economics)로 바꿨지만 4년만에 대학을 졸업하는 억척스러움을 보였다. UCLA 재학 중에도 식당의 웨이트리스 등으로 계속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용돈을 벌었다. 그녀는 “고등학교, 대학교 재학시절 계속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근로의 소중함을 깨닫고 독립심도 익혔으며 돈벌기가 쉽지 않다는 점도 느꼈다”고 말했다.
81년 뱅크 오브 아메리카에 대출담당 오피서로 입사한 그녀의 첫 월급은 1,050달러. 은행업무 경험이 전혀 없었던 그녀는 다른 오피서들에 비해 적은 월급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했지만 소비자 론 오피서, 커머셜 론 오피서, 우대고객부 담당관 등을 거쳐 BOA에서 한인으로는 처음으로 1989년 지점장으로 승진했다.
론 오피서로 일하면서 한인 고객을 믿고 대출을 해줬다가 손실 처리된 때도 있었다. 지난 85년 홀몸으로 어린 딸을 보살피며 보석상을 운영하는 한인 여성을 믿고 선뜻 4만달러를 대출해줬는데 한번만 페이먼트를 내고 사라져 손실 처리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대출을 갚지 않은 그녀가 수년 후 텍사스주에서 교통사고로 숨졌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접하고 씁쓸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고 한다.
그녀는 수 차례의 실수와 시행착오를 통해서 “뱅커로서 뜨거운 가슴 못지 않게 냉철한 두뇌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강조했다.
■폭동계기 뱅커 사명 인식
LA 폭동은 그녀에게 은행의 역할과 뱅커의 사명을 절실히 깨닫게 해준 계기가 됐다.
폭동으로 그녀가 지점장으로 일하던 올림픽-유니온 지점은 이틀간 폐쇄됐다. 당시 BOA는 폭동으로 업소가 전소되는 등 피해를 입은 피해자들을 긴급 지원하기 위해 2,500만달러를 들여 ‘Small Business Investment Program’을 시작했다. 피해자들에게 간단한 서류 한 장만 받고 첫 3년은 무이자에 나머지 7년은 5%의 고정금리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조건의 대출로 큰 호응을 얻었다. 2,500만달러 가운데 70%가 이 지점에서 나갈 정도로 바빴다. 이 프로그램의 60%를 한인 피해자들이 차지, 한인 사회는 이 프로그램에 힘입어 피해복구에 큰 힘을 받기도 했다. 박 부행장은 “피해자들에게 지원서를 써주는 등 현장에서 어려움에 처한 그들을 도와주면서 은행의 커뮤니티 이익환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몸소 체험하는 계기가 되었다”며 “뱅커로 일하면서 가장 고단하면서도 가장 보람을 느꼈던 시기였다”고 회상했다.
■우대고객 담당 부행장으로
웨스턴-올림픽, 라치몬트, 윌셔센터, 라카냐다 등 한인 밀집 지역의 지점장을 두루 거친 박 부행장은 97년부터 우대고객부 매니저로 자리를 옮긴 후 2000년 우대고객 담당 부행장으로 승진했으며 예금, 대출 등을 합쳐 은행과의 거래액수가 30만~40만달러 정도에 달하는 우대고객의 재산관리를 전담하고 있다. 박 부행장은 22명의 직원을 두고 우대고객의 모기지, 저축, 체킹, 크레딧카드, 홈에퀴티 라인 오브 크레딧, 온라인 뱅킹, 재정계획, 뮤추얼 펀드, 증권 등 일체의 금융서비스를 관리해 주는 일을 하고 있으며 현장에서 뛰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직원교육과 새로운 프로그램 개발 등에 할애하고 있다. 앞으로는 한인, 중국인등 아시안 고객들을 전담하는 ‘아시안 퍼시픽팀’의 팀장으로 아시안 고객들을 전담할 계획이다. 재정계획과 관련된 라이선스를 다 취득해야 하는 등 공부할 것이 많지만 우대고객의 재산을 관리하는 일이 재미있다고 한다. 그녀는 “가능하면 한 은행에서 포괄적인 서비스를 받는 것이 은행으로부터 더 많은 혜택을 받는 등 고객들도 유리하다”고 조언했다.
■생활철학과 스타일
그녀는 항상 솔선수범하며 내가 하기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요구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또한 부하 직원들에게 보스보다는 친구의 입장으로 스스럼없이 접근하다보니 직원들이 더 열심히 일해 실적을 올려준다는 것이 성공의 비결이다. 청렴결백을 생활신조로 갖고 있는 그녀는 항상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신조를 갖고 은행업무에 임했다고 한다. 한번은 한인 고객으로부터 뇌물을 받았다고 모함을 받은 적도 있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모든 오해가 풀렸다고 한다.
그녀는 은행에서 일하면서 ‘남가주 아시안 아메리칸 리더십 네트웍’의 회장으로 일하면서 한인등 아시안 직원들의 권익향상을 위해서 일하고 있다. 미 주류은행에서 일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을 받을 수도 있는 아시안 직원의 권익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 직원들을 위한 상담활동도 벌이고 있다. 그녀는 또한 KYCC, 한인가정상담소의 이사 등으로 일하면서 비즈니스 운영세미나도 하는 등 봉사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그녀의 꿈은 높은 직위에 오르거나 많은 부를 축적하는데 있지 않다. 직원들을 가르칠 때 가장 보람을 느낀다는 그녀는 은퇴하면 한인타운 비영리기관 등에서 뱅커들을 위한 연수교육 프로그램 등도 가르칠 계획이다. 그녀는 “매순간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다 보면 좋은 결과가 올 것”이라는 것을 믿는 낙관주의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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