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없어야 한다. 그러나 잊으면 안된다
북가주 재향군인회 소속 참전용사들 ‘한국전 좌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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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1950-1953). 수백만명의 사상자를 낸 그 동족상잔의 비극은 많은 사람들 뇌리에서 까마득한 옛일처럼 차츰 잊혀져가고 있다. 그 전쟁의 아픔을 까딱 잘못 말했다가는 ‘수구 꼴통’ ‘낡은 반공주의자’ 쯤으로 매도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한국전에 직접 참가해 그 비극을 몸소 체험한 역전의 용사들은 5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몸서리를 친다. 한국전을, 다른 사람들은 다 잊어도 자신들은 끝내 잊을 수 없는 참전 용사들이 한국전 발발 55주년을 1주일 앞둔 지난 17일 오후 샌프란시스코 산왕반점에서 만나 전쟁이 다시 없기를 바라며 전쟁을 이야기했다. 이날 좌담회는 일정한 주제를 정하지 않고 참석자들이 한국전 참전계기와 경험담 등을 자유롭게 개진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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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담회 참석자
박신일 북가주 재향군인회 회장(특수정보대 대원)
유정웅 ″ 사무국장(수도사단 학도병)
강용운 ″ 회원(수도사단 1연대)
이종관 ″ 회원(수도육군병원 작전과장)
백성철 ″ 회원(3사단 헌병중대)
해리김 ″ 회원(군수물자 검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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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일(당시 특수정보대 대원. 현 북가주재향군인회 회장) : 전쟁이 일어나던 해 나는 고등학교 졸업반이었는데 특수정보대 호출을 받았다. 최전방 고성 속초 간성 과천 강화도 등지의 전쟁터를 돌아다녔고 심지어 전라도 남원에까지 내려갔다. 정보부대원이라 총 없이 무전기 가지고 작전도 하고 그랬다. 요즘같이 좋은 기계가 있나. 발로 뛰어서 정보를 입수하고 분석하고 작전을 세웠다.
▶이종관(당시 수도육군병원 작전과장) : (해방 이듬해인) 46년에 조선국방경비대 7연대에 들어가 하사관으로 복무하다, 동란(한국전) 직전에 장교로 임관했다. 전쟁초기에 대전까지 후퇴했는데 부대장이 다시 북진명령을 내려서 거꾸로 수원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후퇴명령을 받고 천안 조치원 대전을 거쳐서 울산까지 밀려나기도 했다. 적기공습으로 수만명이 죽는 것을 봤는데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1953년7월에) 휴전회담이 성립됐는데도 사흘동안 전투를 했는데 상부에서 엄명을 하는 바람에 끝났지.
죽고 다치고 포로가 되고…나는 살아났지만
돌아오지 못한 전우들 생각하면 가슴아프다
▶강용운(당시 수도사단 1연대 대원) : 7·27(휴전조인) 임박해서 중공군 인민군 하고 금화지구에서 심한 전투가 있었다. 그걸 7.13 전투라고 한다. 그때 우리 사단 전체가 완전히 포위돼서 무수히 죽고 다치고 또 포로들이 많이 됐다. 나는 CP에 있어서 간신히 살아났다. (전쟁이) 끝난지 오랜데 아직까지 (한국으로) 못넘어왔다. (북한에 생존하고 있는 국군포로가) 600명이라고 그러는데 그 숫자가 미덥지는 않다. 돌아오지 못한 전우들 생각하면, 그게 제일 애절한, 가슴아픈 일이다, 군인들이 못돌아왔다는 것이.
▶백성철(당시 3사단 헌병중대) : 대구 헌병대에 있었는데, 그때 대구는 딴 데와 달라가지고 빨갱이가 많았다. 열 잡으면 여덟이 빨갱이라. 전쟁통에 대구에서 20리쯤 떨어진 곳에 중석(텅스텐, 무기의 재료) 광산을 지켜야 하는데, 하루는 헌병단장이 거기 갔다가 죽었다. 실은 나 한테도 가자고 그랬는데 무슨 일로 안가게 됐는데, 그때 따라갔으면 나도 죽었을 것이다.
▶해리 김(당시 군수물자 검열관, 현 SF-서울 자매도시위원장) : (좌담회 도중 점심식사가 나오자) 이렇게 밥을 먹을 때마다 6·25 생각만 하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그때 보리죽만 3개월동안 먹은 적이 있다. 그것도 못먹을 때도 많았고. 차량도 제대로 없어서 우리 방위군(한국군)들이 굶고 걸어다니면서 전쟁하느라, 참, 굶어 죽고 지쳐서 죽고, 말도 못했다.
▶유정웅(당시 수도사단 소속 학도병. 현 북가주재향군인회 사무국장) : 6·25때 함남 단천에서 고급중학교 1학년(16살)에 재학중이었다. 우리집이 병원이었다. (국군과 유엔군) 북진 때 수도사단 의무대대가 우리병원에 주둔하게 돼 인연을 맺었는데 나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카빈소총 한자루 메고 쫓아다녔다. 성긴 길주 명천 청진까지 북진했다.
▶이종관 : 북진 하니까 (생각나는데) 우리 7연대가 압록강 물을 떠서 (이승만) 대통령한테 바쳤다.
▶강용운 : 평남에 소련군 들어와가지고 도둑질 부녀강간, 그거 무척 심했다. 나는 평양에 살았는데 (소련군이) 하도 그러니까 집집마다 통을 줄에 매달아서 연결해놓고 소련군이 닥치면 연락하고 그랬다. 소련사람들 평양 열혈청년들한테 맞기도 많이 맞았지. 평안도 사람들 박차기 잘하잖아.
▶박신일 : 나도 소련군이 얻어터지는 것 봤다. 그런데 우리 1세들이 다 사라지기 전에 이런 얘기들을 잘 모아서 후세들이 망각하지 않도록 해야겠는데, 참, 그게 아쉽단 말이야.
▶이종관 : 수많은 사람들이 동란에 그렇게 고생했는데 사람들이 망각하고 있어 안타깝다.
게 뭐야 이게. 어린이 과자값도 아니고.
▶유정웅 : 맞다. 안타까운 게, 6·25 참상이 다 잊혀져간다. 분위기가 좀 그러니까 6·25 전쟁은 엄연히 남침한 것인데도 우리가 북침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 전쟁역사를 바로 알려줘야 한다. 사실, 목을 내놓고 싸운 사람들한테 대우도 좀 그렇다.
▶박신일 : 젊은 세대가 (한국전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질 수도 있는 있지만, 과거의 비극을 잊어서는 안된다. 전쟁은 두번 다시 없어야 되지만 그러기 위해서라도 전쟁의 비극을 망각하면 안된다. <정리-정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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