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은 자진사퇴…실상은 경질
협회 본선서 禍 자초하느니 새출발
감독 잇달아 낙마…협회 난맥 드러내
“팬들의 비판을 겸허히 수용하지만 시간을 더 달라.”(21일 프로축구 올스타전이 열린 서울 월드컵 경기장에서) “현재의 여건하에서는 감독직을 수행하기 어렵다.”(22일 축구협회에 전화 통보한 내용)
요하네스 본프레레 대표팀 감독이 하루만에 자신의 입장을 180도 바꿔 물러났다. 대한축구협회 이회택 기술위원장은 23일 “본프레레 감독이 전날 저녁 전화 통화를 통해 협회에 사퇴의사를 통보해와 이를 수용했다”고 말해 경질이 아닌 자진 사퇴임을 강조했다. 본프레레 감독도 이날 사퇴발표 뒤 기자들과 만나 “퇴진 압력은 없었고, 사우디 아라비아전 이후에 그만둘 결심을 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과거의 전례를 보나, 최근의 정황에 비춰볼 때 경질임이 분명하다. 전임 코엘류 감독을 퇴진시킬 때도 축구협회는 자진 사퇴의 형식을 취했다. 이번에도 협회는 현 체제로는 내년 독일월드컵에서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는 성적을 내기 어렵다는 판단아래 감독에 대한 경질의사를 굳히고 후임자 물색작업을 물밑에서 진행해 왔다.
물론 그 동안 고민도 적지 않았다. 일단 월드컵 본선 6회 연속 진출이라는 나름의 업적을 남긴 감독을 자르는 것도 부담이었다. “현실적 대안이 없다”거나 “독일월드컵까지는 10개월 밖에 남지 않아 물리적 시간이 촉박하다”는 이유도 작용했다. 그러나 동아시아 선수권 대회에서 거듭된 졸전 끝에 꼴찌를 한데 이어 사우디와의 월드컵 최종예선 마지막 경기에서도 패배, 여론이 들끓자 퇴진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뚜렷한 전술도, 색깔도 없는 무능한 감독과 함께 본선에 나가 화를 자초하느니 과감하게 새 출발하는 편이 낫다는 결론이었다. 기술위원 사이에서는 “국내 감독도 본프레레 감독보다 더 잘 할 수 있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이날 기술위에서도 본프레레 감독의 사퇴수용에 대해 전혀 이견이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또 후임자를 물색해본 결과 저명한 새 감독을 데려올 수 있다는 자신감도 고려됐다.
하지만 협회의 이번 결정은 도박일수 밖에 없다. 코엘류에 이어 본프레레마저 낙마시킴으로써 두 번이나 헛발질을 거듭한 협회행정의 난맥상은 논외로 치더라도 유럽출신의 명감독을 모셔온다고 반드시 좋은 성적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한국 축구를 조기에 파악, 선수들을 장악할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도 없다. 실제로 다음달 중 새 감독이 오더라도 선수들과 호흡을 맞출 수 있는 기간은 해외파의 경우 30일 안팎, 국내파의 경우 70~80일 정도에 불과할 전망이다. 이 기간으로 독일 월드컵에서 16강 이상의 성적을 낼 수 있을 지 의문이다. 한 축구계 인사는 “이제 어차피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른 시간내 새판을 짜서 독일월드컵 준비에 올인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말했다.
박진용 기자 hu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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