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며 생각하며
▶ 유설자 <워싱턴여류수필가협회>
체감온도 100도를 훨씬 넘는 무더운 날이다. 갑자기 쏟아 붓는 소나기가 뜨겁게 달군 대지를 식히느라 아스팔트의 열기가 휙휙 숨을 몰아쉬며 뿌연 김을 마구 뿜어댄다. 하늘을 가를 듯 번득이는 불빛과 우당탕 질러대는 자연의 소리가 그리 싫지 않은 오후 한때. 20년이 훨씬 넘은 그날도 이렇게 소나기가 마구 퍼부었다. 뉴욕에 살고 있는 친구의 비보를 듣고 기막혀 분노했던 그날의 추억이 자꾸 슬픈 연민의 늪으로 빠져든다. 10년의 열렬한 연애 끝에 결혼하고 첫아들을 낳아 첫돌 며칠을 앞둔 어느 날, 모두가 부러워하는 좋은 직장의 엘리트로 잘나가던 신랑이 불행하게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갑자기 당한 슬픔을 어떻게 이겨야 하나 울부짖던 친구는 아기와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남편이 남겨놓은 자금으로 정신없이 뛰었다.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기 시작할 즈음 자신의 존재와 의미에 대해서 종종 회의가 생겼고, 앞으로의 생활 진로에 대한 갈등 속에서 미래를 위해 투자하기로 굳게 마음먹고 미국행을 결심했단다.
서양속담에 “하늘이 비를 내리기로 결정하고 어머니가 재혼하기로 마음먹으면 막을 도리가 없다” 했는데 주위에서 그렇게 말렸는데도 친구는 어린 아들을 친정에 맡기고 캐나다를 경유 어렵사리 미국에 왔다. 처해있는 현실이 힘들고 버거워도 영주권 받고 다시 만난다는 희망으로 이를 견뎠다. 그날도 영주권 수속을 위해 변호사를 만나고 나오는 길에 어처구니없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사고차는 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뺑소니 차였다. 연고자 없이 노동허가서만 받은 신분으로 시립병원에 입원해있다는 소식을 뒤늦게 듣고 허겁지겁 찾아간 나는 독방에 누워있는 친구의 모습을 보고 기겁을 했다.
눈은 초점을 잃고 목과 양팔에 연결된 흰 붕대로 매어져 양팔이 좌우로 허공을 행해 기계처럼 허우적거리는 몰골로 변한 괴물(?)이 되어 있었다. “너, 이 꼴로 병원에 누워 있으려고 미국 온 거 아니잖아. 말 좀 해봐, 이 바보야.” 소리치며 떼를 썼지만 아무 대답이 없다. 그래도 내가 누군지는 알았나 보다. 심장박동 모니터에 그려지는 파장이 갑자기 널뛰기를 한다.
급히 수속해 온 아들과 한마디 대화도 나누지 못한 채 어처구니없는 삶의 종말을 맞고 말았다. 시련과 아픈 경험을 통해 세상을 관망할 줄 아는 통찰력을 가졌고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친구였는데. 얼마나 가엾고 불쌍한지 난 뉴욕으로 정신없이 달렸다. 플러싱의 한 장의사에서 목사님을 모시고 쓸쓸하게 치러진 장례식.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찬송을 부르며 얼마나 울었는지.
유일한 자기의 분신인 아들을 홀로 남겨두고 이 세상을 떠나는 엄마의 기막힌 운명. 화장터에서 한 줌 재로 변한 상자를 품에 안고 오열하는 아들. 엄마 없는 고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아들의 처지. 이보다 더한 슬픈 이별이 또 있을까.
이 친구가 생각나는 날이면 지금도 메어지는 가슴을 달래느라 한참을 애써야 한다.
유설자 <워싱턴여류수필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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