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한은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긴다” 라는 말이 있다 봉사센터에서 일하면서, 또는 양로원 사역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특히 이마의 주름 속에 숱한 고생을 숨기시고 하얀 치아 넘어 순진 무구하게 웃으시는 우리네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만나면 꼭 내 어머니, 아버지의 얼굴을 뵙는 것 같아 가슴이 뭉클할 때도 있고, 딱한 사정이 마주칠 때는 나도 마음이 아파 어쩔 줄 몰라 한다. 때로 애를 써서 도와드리려 해도 조건에 맞지 않아 도와 드릴 수 없는 분들도 있고, 그런가 하면 일이 꼬여 잘 안될 때 가슴 저미도록 아픈 항의를 받아 본적도 있다. 그토록 정열을 토하면서 항의를 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아, 이것이 바로 내 모습이구나” 생각을 했다. 눈물 나게 어려운 일이 있을 적마다 한번도 나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언제나 나를 도와주시고 감싸주시고 늘 함께 하신 하나님께 감사는 빤짝 한 순간 이요 늘 불평 불만하며, 때로 사랑하는 이웃과 심히 다투면서 살아왔던 내가 아닌가.
두달 전인가 보다. 봉사센터에 할머니 한 분이 편지를 들고 찾아 오셨다. 푸드스탬프와 메디케이드 갱신하러 인터뷰에 오라는 편지였다. 인터뷰 날이 되어 할머니를 모시고 폴스 처치 패밀리 서비스 센터로 향했다. 대기실에서 이야기 도중 나는 할머니 하시는 말씀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할머니는 미국에 가지 마시고 함께 살자고 졸라대는 아드님을 한국에 두고 따님 사시는 미국으로 이민을 오셨다. 미국에 오신 후 열심히 공부하여 시민권도 받으시고 기한이 되자 에스,에스,아이 와 메디케이드, 푸드스탬프 등을 신청하고 노인 아파트에도 입주하여 자녀 걱정 안 끼치고 독립하여 사실 수 있게 되었다. 할머니는 모든 것을 은혜로 베풀어 주신 하나님과 세금 한푼 낸 적이 없는 노인에게 이렇게 생활비며 의료 보험 혜택까지 준 미국에 늘 감사하였다. 할머니는 이렇게 고마운 나라에 어떻게든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할머니가 미국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영어를 못하니 말로 누구를 도와줄 수가 있나, 운전을 해서 남을 태워다 줄 수가 있나, 아무리 궁리를 해도 뾰족히 도울 일이 생각나지를 않았다. 그저 몸뚱이 하나만 가지고 있을 뿐, 미국에 은혜를 갚을 길이 없어 안타까울 뿐이었다.
궁리 끝에 단 한가지 가지고 있는 자신의 몸으로 은혜를 갚고 싶어서, 할머니께서 죽게 되면 온몸을 장기 기증 한다는 서명을 했다는 것이다. 팔 다리 없는 사람에게는 할머니 팔다리 떼어서 달아주고, 눈이 필요한 사람에게 눈도 빼어 주고, 간이나 쓸개, 콩팥이 없는 사람에게 자신의 것을 떼어 주어 이 나라에 입은 은혜를 갚고 싶으시다는 것이었다.
그 후 한달 쯤 지났을까, 갑자기 교통 사고로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신문에서 읽고 깜짝 놀랐다. 할머니는 가셨지만, 할머니가 기증한 눈은 아직도 살아서 나를 지켜보는 것만 같고, 할머니가 기증한 장기들은 어느 누군가의 몸 속에서 살아 지금도 내 곁에 숨쉬고 계신 것만 같다. 할머니는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은혜를 타인의 肉碑에 새기고 가신 분이다. 감사하는 자는 곧 생명을 살리는 자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늘 불평만 하던 나도 이제는 할머니처럼 감사하는 자가 되어 남을 살리는 자가 되어야겠다.
오옥희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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