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 같은 진담이 있다. 친척의 가게를 맡기로 하고 사십 넘어 이민 온 김 선생은 공항에 내리자마자 가게로 직행했고 그 가게에 딸린 집에다 짐을 풀었다. 그리고는 30년이 흘렀다. 출가한 딸이 찾아와 모처럼 함께 라구나비치를 찾았는데 차에서 내렸을 때 김 선생은 너무 놀랐다.
“아니, 이렇게 많은 백인이 미국에 있다니!!” 내가 그 말을 들었을 때 “아무렴, 정말 그랬을라구”하고 농담으로 웃어넘겼는데 지금 내가 그런 가게를 하고 있고 점점 더 그런 처지가 되어가고 있다.
처음 가게를 인수했을 때 찾아온 친구가 “이거 축하한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안됐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군 그래. 더더구나 자네 같은 경우, 가게 하면서 개인시간 내기가 쉽지 않을 텐데”하며 웃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말이 실감나기 시작했다.
마켓을 하면서 느낀 점은 아무리 작은 마켓이라도 덤벙덤벙 넘어갈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작은 마켓 운영이 머리를 쓸 만큼 복잡하거나 할 일이 계속 생겨서가 아니라 그와는 정반대이기 때문이었다.
마켓에 바치는 시간이 온전히 내 시간이면서 온전히 내 시간이 아니라는 것이 나를 미치게 했다. 가게 안에서 재깍재깍 지나가고 있는 멍청한 시간을 붙잡을 일이 필요했다.
마켓 도사인 친구는 시간 날 때마다 전화를 걸어와서 손님이 없는 한가한 시간이라고 TV를 본든가 신문을 집어든다든가 특히 나 같은 경우 책을 읽는다든가 글쓰는 일에 빠지는 것은 마켓을 우습게 여기는 마켓 모독죄에 해당될 뿐만 아니라 마켓을 말아먹는 지름길이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떠들어댔다. 그래서 그런 것들은 모두 접어두기로 하고 온 정신과 육체를 가게에 쏟으면서도 내 시간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곧 그것을 찾아냈다.
그 방법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몰라도 나에게는 하루의 14시간 이상을 마켓에서 보내야하는 나에게는 내 시간을 찾을 수 있는 가장 유일하고 가장 적합한 방법이었다.
무엇인가에 깊이 빠져보는 일은 언제나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그 대상이 사람인 경우에는 더 그렇다. 특히 라틴계 손님을 관찰의 대상으로 삼았을 때는 더더욱 그러했다. 큰 미소와 약간의 제스처, 두세 마디의 단어로는 그들의 생각, 그들의 느낌, 그들의 감정을 전혀 알 길이 없었으므로 나는 여타의 사유(思惟) 작용은 생략하고 전적으로 직관(直觀)에 의존하여 그들을 관찰하기로 했다.
새로운 손님이 들어온다. 입구를 들어서는 순간의 외모와 첫인상, 몸놀림, 걸음걸이, 마켓 주인인 나를 힐끗 바라보는 눈길과 안을 두리번거리는 모습으로 순식간에 그의 전부를 파악해 버리는 것이다. 추측과 어설픈 판단은 금물이다.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일시에 꿰뚫어보는 것이다. 이 방법으로 나는 내 마켓을 제 집처럼 하루에도 수십번도 더 드나드는 어린아이들과 꼬부랑 노인네들, 거지와 창녀들, 틈만 나면 무엇이건 훔치려드는 좀도둑들과 그들을 등쳐먹는 하이에나에 이르기까지 밑바닥 인생의 온갖 종류의 삶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손님이 없을 경우에는 마켓안의 진열대에 놓여 있는 온갖 종류의 물건들을 들여다보았고 통풍구를 통해 들어오기 시작하는 아침 햇살이 무지하게 빠른속도로 돌아가는 커다란 날개에 조각나는 순간을 관찰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꼼짝없이 갇힌 마켓에서 내 시간을 찾아냈던 것인데, 마켓 속에서 찾아낸 나의 시간이 뜻밖에도 내가 마켓 밖, 저 자유로운 시간 속에 있었을 때보다도 더 나의 직관력을 예리하게 다듬을 수 있는 기회가 되어준 것이다.
이윤홍 시인·자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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