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고작 책이나 빌려주려고 그동안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 거야?” 6년반 전, 오랜 대학원생활을 하던 중 대학 도서관 사서란 직업을 택했을 때 9학년 아들이 내게 한 말이다. 중학생 딸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니 어쩌다 이런 일이?’ - 아이들에게 엄마가 공부해온 분야와 앞으로 할 일에 대해 그동안 무심하게 넘겼던 설명을 한꺼번에 알기 쉽게 해줘야 하는 순간이었다.
“엄마 꿈이 말야, 아주 어렸을 땐 만화방, 그러다가 책방으로 변했는데 이제 사서가 되면 직접 책방을 운영하는 대신 대학교 돈으로 책방을 경영하는 거란다”
2남3녀 중 막내였던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형제들을 대표해 ‘우리 집 만화방’을 운영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했다. 동네 만화방에 가서 따끈따끈한 신간들을 빌려오는 일이었다. 어린 내가 언니, 오빠들의 취향을 알 수가 없으니 전적으로 만화방 주인아저씨의 맞춤 서비스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우리 집 고객들의 신상명세와 취향을 쫙 파악하고 계셨던 아저씨께서 알아서 척척 골라주셨고, 언니오빠들도 항상 아무 불평 없이 만화방 아저씨의 선택을 즐겼다. 주로 스포츠나 사극, 탐정물을 즐겨 봤고 잘 기억이 나진 않지만 박기정, 박기당, 이범기의 작품은 나오는 대로 죄다 섭렵했다.
나의 또 다른 임무는 빌려온 만화를 공부방에 있는 벽장안에 가나다 순으로 진열해 놓고 교과서 책갈피에 만화책을 꽂아서 언니오빠들이 엄마에게 걸리지 않도록 망을 보는 일이었다. 이런 ‘우리 집 만화방’ 경력이 당시로서는 독특했던 만화방 운영이란 꿈을 가지게 했던 것 같다. 그러다 어느날 만화방 꿈이 책방으로 바뀐 순간이 왔다. 5학년 때였지 싶다. 한참 루팡과 홈즈에 취해 있던 짝꿍 덕분에 추리소설에 흠뻑 빠져 있을 때 학교 도서관을 담당하고 계시던 선생님께서 우리 담임 선생님 대신 국어시간을 맡으신 적이 있었다. 그때 도서관을 소개해 주셨고 난 아직 읽지 못한 모리스 르블랑의 책들이 있나 싶어 그날로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그 선생님은 한방에 짝꿍이랑 찾아 헤매던 ‘노란 방의 수수께끼’ 뿐만 아니라 우리 입맛에 딱 맞는 다른 추리소설들도 찾아주셨고, 그 감격스러운 순간 이후 나는 졸업할 때까지 도서관 애용자가 되었다.
직업은 다를지 몰라도 우리는 모두 분명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정보를 가지고 있거나 필요한 정보를 어디서 얻을 수 있는지 알고 있다. 모두 정보전문가인 것이다. 요즘처럼 정보의 양이 폭발이니 홍수니 할 정도로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는 시대에는 가치 있는 정보들을 걸러내는 정보전문가 역할이 점점 더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사서는 바로 그 가치 있는 정보들을 모아 잘 정리해서 원하는 사람에게 제공해 주고, 또한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정보원들에 대한 지식을 토대로 맞춤 서비스를 해주기도 한다. 그러니까 사서의 전문분야는 정보원, 즉 자료와 그 자료를 다루는 시스템, 그리고 나름대로 그 자신 정보전문가인 이용자들인 것이다. 맞춤형 서비스로 나의 꿈을 탄생시킨 동네 만화방 아저씨나 초등학교 사서 선생님처럼 말이다.
“그런데 학교 책방을 잘 운영하려면 우선 자료랑, 자료를 정리하는 시스템이랑 그리고 자료를 사용할 사람들의 관심분야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하고 그에 따라 좋은 자료를 모아 잘 정리해서 이용자들이 정보가 필요할 때 최대한 도와주는 거란다”
이제 대학생들이 되어 학교 도서관을 열심히 이용하고 있을 아이들에게 6년반 전의 내 설명이 도움이 되었는지, 지금은 사서란 직업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번 물어봐야겠다.
김선윤 USC 도서관 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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