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호 시인·RV 리조트 경영
산장의 생활도 2년이 지났다. 이제 여름에는 틈틈이 책을 읽고 좀 한가한 겨울에는 글을 쓰는 계획을 세울 수 있는 여유가 생겨 다행이다.
오늘 아침에 사무실로 나올 때 책장에서 문학사상 5월호를 뽑아 나왔는데 읽다보니 직년 5월호 였다. 마침 월북작가 박태원의 소설(조국의 깃발)이 특집으로 나와서 시대나 이념을 배제하고 작품으로 읽기로 했다.
그러나 “원수의 국방군과 미군이고 껌둥이고 다 말살시키겠다”는 독설들을 도저히 문학적으로만 읽을 수 없었다. 그래도 단편소설이라 끝을 내려고 꾸역꾸역 읽다가 끝 부분에 영덕만 달걀고지 전투장면에서 인민군이 수류탄으로 미군을 공격해서 수많은 미군들이 죽어 가는 처참한 장면을 읽고 있는데 손님이 왔다.
“헬로우” “하이” 하고 답하며 그를 쳐다보니 한국전 참전용사들이 애용하는 ‘W.W.2+KOREA’라고 쓰여진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 모자를 처음 본 게 아닌데도 순간 움찔 놀랐다.
“한국인이죠? 태구우 알아요? 나 태구우 8군사령부에서 부상병으로 제대했어요. 내 다리 한쪽은 아직 한국 어딘가에 있을 거요. 무슨 책을 그리 심각하게 읽어요?”
인민군들이 미군들이 죽고 부상당하는 참혹한 장면을 보며 통쾌해 하는 장면을 읽다가 받은 질문이라 너무 당황해서, 내가 대구 사람이란 대답도 못하고 그냥 문학지라고만 말했다. 어쩌면 이 노인도 영덕 그 달걀고지에서 부상을 입은 게 아닌가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남한 사람들이 요즘 우리 미국을 왜 그리 싫어해요? 그때 남과 북이 서로 친하게 지냈더라면 우리 친구들도 그렇게 많이 죽지 않았을 것인데…”
“오해예요. 극소수 외엔 모두 미국을 우방으로 알고 있답니다.”
그는 평택 미군기지의 극렬한 데모 사건이나 유엔에서 한국정부가 북한 인권문제 투표에서 기권한 것도, 미군들의 실수는 용서하지 않으면서도 하인즈 워드는 순수 한국인처럼 대우하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화장실도 제대로 없던 열악한 환경에서의 고생담을 줄줄 엮어놓으며 그래도 한일 문제나 야구, 축구 같은 국제게임 때 미국과의 대결이 아니면 한국 편이 된다며 지긋이 어금니를 물었다.
그 날 오후 내내 나는 스스로 채권자로부터 빚 독촉을 받는 사람처럼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 그런 분들을 위해 준비해 놓은 갈비와 잡채로 대접했다.
세월이 약이라지만 방공호에 숨어서 듣던 쏟아지던 총알과 폭탄 소리, 6.25 기념일마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노래를 온몸을 전율하며 불렀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간 북에다 식량과 비료를 퍼주고 소 떼를 몰고 가고 장님 코끼리 만지듯 하는 금강산 관광으로 돈벌이를 시켜주며 온갖 비위를 맞춰주고, 철로 재료까지 다 대주며 38선을 뚫은 철로도 이산가족들을 기차에 싣고 달릴 수 없으니 평화는 겉치장뿐이고, 달라진 것은 지금 이북이 핵폭탄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뿐인 것 같다.
박태원의 의붓딸 정태은이 북한잡지 통일문학에 ‘나의 아버지 박태원’이란 글을 기고했는데, 그의 아버지가 작품으로 당에 충성한 대가로 김일성 장군의 은덕을 입어 호의호식했다는 것을 자랑하고 있다. 한 작가의 부끄러운 일을 새삼 들춰내겠다는 게 아니라, 현재 대한민국의 양극화와 현 정부나 각계각층에 친북 인사들이 많아 보여 걱정하는 것이다.
서울 월드컵 이후 유월은 축제의 달로 변했다. 좋은 일이지만 아직은 유월의 참극을 잊어서는 안 된다. 미국 각처에는 그 날의 참상 현장의 사진이나 전쟁 유물들을 보관하고 있는 크고 작은 한국전 기념박물관이 많은데, 곳곳에서 박물관들을 꿋꿋이 지키고 있는 참전용사들을 만나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역사는 환희, 고통 그 어느 한순간도 건너뛰지 않는다. 불온한 사상으로 인권과 민주주의를 매도하는 일은 애국애족이 아니다. 그 광란의 역사와 혼란스런 현실로 우울한 유월을 맞았었는데 토고와의 첫 승리를 보며 한결 마음이 상쾌해졌다. 태극전사들의 건강과 좋은 결과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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