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콘텐츠를 담는 그릇
로스앤젤레스 오페라의 공연장 로비에서 환담하는 한인들의 숫자가 늘어가고, 한인들의 오페라에 대한 관심도 점차 커지는 것은 참 반가운 현상이다.
지난 2월10일까지 LA 오페라단에서 공연되었던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비용과 기술 문제 때문에 자주 보기 힘든 바그너의 오페라를 접할 드문 기회였다. 이 작품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던 남녀가 죽음을 통해 사랑을 완성한다는 철학적인 주제로서, 바그너 자신이 베젠동크 부인과의 연애를 예술로 승화시킨 작품이다. ‘죽음의 예찬’처럼 느낄 수도 있지만 오해가 풀리고 사랑을 축복받기 직전 죽음을 맞이하는 안타까운 결말에서 죽음이 영적 세계를 열어주는 통로라는 깊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지나치게 강한 바그너의 성품과 기행적인 삶의 여정 때문에 평소 그의 작품에 별 호감을 느끼지 못하던 차에 이번 LA 오페라가 아쉬움 없게 이루어낸 시원하고 깊은 감동은 작곡가 바그너의 작품과 그에 대한 나의 인식을 새롭게 가지도록 한 좋은 경험이었다. 특히 그 ‘무겁다’는 인상의 ‘바그네리언’ 오페라의 무려 4시간 ‘마라톤’ 공연이 아쉬우리만큼 짧게 느껴진 데에는 이졸데 역을 맡은 린다 왓슨의 우아한 싱잉, 깊이 있는 바그너의 오케스트레이션을 화려한 음향으로 잘 이끌어낸 제임스 콘론의 지휘, 데이비드 하크니의 화려하고 신비한 분위기의 무대 디자인, 그리고 드웨인 슐러의 조명 연출 등이 이번 공연의 보배였다.
1813년에 태어난 바그너는 ‘통일 독일’의 형성에 구심적 역할을 할 만한 자작의 ‘신화’를 바탕으로 오페라를 넘어서는 ‘음악극’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내었다. 타계한 지 올해로 125년이 되었지만 ‘음악극’은 아직도 바그너만의 독무대이다. 그러나 결코 ‘음악극’은 바그너 개인의 창조물만이 아닌 독일 민속음악에서 비롯된 것으로, 마치 일본의 전통극인 ‘가부끼’나 중국의 ‘경극’을 현대화한 것과 같은 양상이다.
대사가 있는 독일 민속 오페라 ‘징슈피엘’의 전통에서부터 바그너의 음악이 오게 되기까지는, 모차르트가 오페라 ‘마술피리’로 그 초석을 놓았고, 베토벤이 ‘피델리오’로, 베버가 ‘마탄의 사수’로 중간 교량 역할을 한 것이 마침내 바그너의 ‘음악극’을 열매 맺는 토양이 되었다. 그 독일의 민속 전통 위에, 불란서 그랜드 오페라의 거장 마이어베어에게서 견습을 거친 바그너가 자신의 창조적 천재성을 가미한 것이 ‘음악극’인데 결국 여러 시대를 거친 전통과 세대를 초월한 집단적 노력의 결집이라 할 수 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구호가 막연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판소리라는 구체적인 소재가, 시대에 맞는 옷을 입고 지성과 감성을 공감하게 하는 감동을 주는 그런 독창적이고 현대적인 한인 작곡가들이 많이 생겨나서 ‘문화 콘텐츠’에 목마른 이 하이테크 사회에 사는 우리의 문화적 자존감을 높여주기를 기대해본다.
한류 열풍이 일반명사의 하나로 자리 잡은 요즈음, 그렇기 때문에 가장 한국적인 것의 유형적인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남대문이 새삼 더 소중하게 느껴지고 소실된 사실이 마음 아프게 느껴지는 것이리라.
■김양희 음악박사: 음악 동호단체 ‘보헤미안’과 ‘LA 오페라 어소시에이션’의 음악감독 및 강사. 라디오서울 ‘김양희의 이브닝 클래식’ 진행자. sopyh@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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