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날이 가까워오니 그때 일이 떠올라 가슴이 아리해진다.
두 번째 개인전을 준비하느라 정신없이 지내던 어느 날 아침 어머니께서 작업실 문을 빼꼼히 여시고 물으셨다. “저 말이다. 트지 않은 설탕 한 봉지 있는데 차 권사님한테 갖다 드릴까?” “그러세요” 얼른 대답하고는 이상하다, 평소에 모든 살림을 몽땅 어머니에게 떠맡기고 나 몰라라 지내고 있는 터에 설탕이 어쩌구 새삼스레 그런 말씀을 왜 하실까? 순간 내 머리에 번개같이 떠오른 것은 ‘아! 어머니 생신. 내가 이럴 수가? 어머니 생신을 까먹다니!’ 영 죽을 맛이었다.
어머니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네가 얼마나 정신없이 바쁘면 이 어미 생일을 깜빡 했겠니. 지난 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더구나. 그 전시회인가 뭔가가 사람 잡는구나. 너무 안 됐다는 생각이 들었어. 마음 쓰지 말아라. 차권사님은 내 생일을 아시니까 네가 보냈다 하고 설탕이나 들고 가서 냉면 한 그릇씩 먹고 올까 했거든. 그럼 갔다올게” 그 한 마디 하시고 돌아서신다. 나는 말문이 꽉 막히고 말았다.
내가 어렸을 때 언제나 울고 계시던 어머니 모습이 눈에 선하다. 망토를 입고 깃또 구두까지 신고 나서는 어머니는 남들에게는 행복한 주부로 보였겠지만 바람을 피우는 남편과 아들만을 기다리는 어른들 닦달에 온갖 방법을 써봤지만 아들을 둘이나 낳고도 잃었고, 양자를 두 번이나 들였으나 애지중지 그렇게 고생하며 사랑을 주었으나 결국은 헛수고가 되고 말았다. 딸 둘만이 남게 되었는데 38년전인 그때, 언니 김기련은 연세대 교수였고 어머니는 나와 함께 쭉 사셨다.
내가 졸업을 할 때 학교에서 추천하는 미국 유학을 단념하고 창덕여고 미술교사로 들어간 것은 해방과 동시에 모든 것을 잃고 38선을 넘어오신 어머니의 그 모진 고생을 덜어 드리기 위해 월급을 타고 싶어서였다.
1949년 당시 미국 유학은 젊은이들의 꿈이었고 학교에서 보내주면 돈이 필요 없었으며 모든 것이 공짜라고 들었으나 나는 어머니 쪽을 택했다. 어머니가 원하시는 청년과 한경직 목사님 앞에서 약혼식을 올렸다. 어머니가 기뻐하시는 일이면 무엇이든 해드리고 싶었으며 물론 나도 싫지 않았다.
나는 결혼을 하자 거의 해마다 줄줄이 출산을 하여 7년 동안에 4남매를 낳았으니 어머니의 수고는 어떤 것이었을까? 그러나 그분은 “내가 못한 일을 네가 해주는구나. 마음대로 아들도 키워보고, 딸도 키워보고…” 평생 아들 못 키운 한을 품고 사시던 분이어서 힘든 줄도 모르고 구질구질한 온갖 일을 도맡아 하시면서도 늘 찬송을 부르시며 즐거워하셨다. 그런 어머니의 희생 덕에 나는 아직도 화가라는 이름을 달고 산다.
설탕 봉지를 곱게 싸들고 나가시는 어머니 손에 지폐 몇 장을 접어 꼭 쥐어드리고 돌아서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엄마 다시는 엄마 생일 잊지 않을게. 내가 죽을 때까지 맹세코…”
김 순 련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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