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엔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감상에 젖어들어 영화구경이나 할 작정으로 어느 몰 안에 있는 극장엘 갔다. 게시판을 살피니 ‘그랜드 토리노’가 상영 중이며 크린트 이스트우드가 주연이고 감독이라 그가 필경 지난날의 그 멋진 총 솜씨로 나의 울적한 심정을 단숨에 날려 버려 주리라. 기대 속에 워너 브러더스의 표장이 열리고 장례미사 장면이 지나니 클린트의 상반신이 쑤욱 하고 크로즈업, 그를 보니 참 반갑다.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이후 2년의 세월이 흐른 것 같다. 그도 이젠 늙어 양 볼에는 어느덧 몇 줄기 깊은 주름살이 생기고 허리는 구부러져있으나 양미간을 찌푸리고 호기찬 눈으로 먼 곳을 쏘아 보는 표정에는 변함이 없다. 그의 마지막 출연이 될 이 영화에서 클린트는 ‘월터’로 분하고 있었다.
월터는 시카고 인근 어느 영세주택가에서 은퇴생활을 하며 그동안 터득한 매케닉 기술로 이웃들의 차도 고쳐주고 자질구레한 심부름도 마다않는다. 때로 포치에 앉아 담배를 씹어대고 연상 ‘찍 찍’ 하며 검은 침을 뱉어버리며 먼 산을 바라본다. 죽은 아내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의 눈가에는 고독의 그늘이 드리워지고 있다. 시간의 흐름 속에 조용하기만 하던 이 마을에도 변화의 물결이 몰려와 동양계 이민자들이 계속 이사들어오고 동네 모양새를 바꿔 놓더니 그들 사이엔 어느덧 깡패마저 자생했다. 월터의 유일한 재산인 포드 그랜드 토리노는 일제 차들에 밀려 메론이 된 지 오래지만 항상 닦아내고 광을 내니 도둑들의 좋은 표적이 되어 급기야 차는 도난당하게 된다. 이웃에 사는 몽 족 청년 타오의 도움으로 차는 되찾게 되지만 곧 이어 조폭들의 보복을 받게 된다. 일기당천의 다수 폭력배들과 대치한 숨 가쁜 상황에서 월터가 뽑아든 것은 콜트 45 가 아닌 손가락총, 엄지와 인지를 내밀며 적들을 조롱 삼았다. 일제사격을 받은 월터는 그 자리에 쓰러지고 카메라는 그가 손에 쥐고 있던 피 묻은 지포 라이터에 줌을 맞춰 말 머리가 새겨진 기병대의 마크를 부각시킨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한국전쟁 때 용맹을 떨친 미 보병 전투사단의 기장이다. 월터가 죽은 후 재산처리 법정에서 담당판사 는 유가족들을 훑어보고 ‘그랜드 토리노는 타오에게 주게 하라’라는 월터의 유서를 또박 또박 읽어나가고 있었다.
클린트와 나는 같은 연배이기에 그에겐 남다른 우정을 느낀다. 어쩌면 그의 영화 제작 배경은 20세기를 걸어온 미국의 역사이며 또한 변화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독립전쟁 이후 몬로주의를 내걸고 내실을 기하고 국력을 키워온 미국은 여러 전쟁을 치러나가면서 ‘황야의 무법자’나 ‘아버지의 깃발’ 등에서 보듯 언제나 권선징악의 편에 서왔다. 그런가 하면 할리우드의 금기를 깨고 그는 적의 편에 서서 이오지마 전투에 촬영 앵글을 돌리고 수많은 일본배우들을 동원시켜가면서 방위사령관인 구리바야시 중장의 내면에 잠재해 있는 휴머니즘과 반전무드를 들추어내기도 했다. 아마도 이 영화는 바락 오바마가 당선되기 훨씬 전에 크랭크인 되었으리라 믿어지지만 그의 마지막 작품을 통하여 앞날에 닥쳐올 미국의 대 변혁을 내다본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예지에 감탄과 존경을 보낸다,
비는 아직도 계속 내리고 있다. 차 엔진을 키고 옆 좌석을 바라본다. 있어야할 자리에 아내의 모습은 없다. 오바마가 대통령에 취임하던 날 하스피스 요양원 암환자실에서 오랜 세월 나의 동반자였던 아내는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유리창 와이퍼는 계속 흘러내리는 빗물을 힘차게 씻어내고 있다. 미국이 변했다. 온 세계가 변해가고 있다. 우울한 마음 걷어내고 앞만 보고 달려가자. 타오도 지금 쯤 그랜드 토리노를 몰고 비 내리는 미시건 호반을 힘차게 달려가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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