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랗고 붉게 물들었던 나뭇잎들이 어제 밤부터 내리는 비에 길바닥에 뒹굴고 있다. 벌써 가을의 막바지, 세월의 흐름을 막을 수 없으니...
캐나다에서 오신 엄마가 어제 새벽 비행기로 떠나셨다. 83세의 나이가 무색하리만큼 용기 있으시고 건강하신 엄마지만 이번에 몇 주 같이 지내다보니 정신이 가물거리시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했던 이야기 또 하고, 소중한 건 잘 간직하신다며 어디다 두셨는지 기억도 못하시고, 지나간 추억들을 자꾸 되새기며 인생에 무상함에 눈물지신다.
딸 일곱을 내리 낳아 동네에선 칠공주집으로 통했고, 아버지가 의사셨기에 명성의원 집으로도 불렸던 후암동 우리 집.
남에게 지기 싫어 하셨던 엄마의 극성스러움에 우리 일곱 자매들은 남들보다 깨끗하게 이쁘게 자랐었다. 아침마다 차례대로 머리를 꽁꽁 땋아주시고, 양재학원에 다니시며 배우신 솜씨로 원피스를 집에서 이쁘게 만들어 입히시기도 하셨다.
마지막 일곱째 아이를 낳던 날은 온 동네가 술렁거렸다. 어떤 사람들은 돈을 걸고 내기도 했었다. 아들이냐 딸이냐 하면서.
산부인과 의사였던 아버지였지만 엄마는 대한극장 뒤 아버지 친구병원에서 막내를 낳으셨는데 병원에 다녀오신 아버지의 표정에서 또 딸이구나를 느끼며 병원에 가보니 엄마의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 너무 많이 우셔서.
하지만 서운함도 잠시뿐, 용감하고 씩씩한 우리 엄마는 남에게 기죽지 않고 열심히 살았다. 초등학교 시절 엄마가 학교에 오시면 난 너무 좋았었다. 어린 마음에도 한복이나 양장이나 무슨 옷을 입으셔도 남보다 월등히 예뻤고, 세련된 엄마가 자랑스러웠다. 엄마는 정말 예뻤고 당당했었다.
세월이 흘러 딸들이 줄줄이 있는 우리 집에 사윗감들이 인사오기 시작했다.
딸 일곱 중 다섯이 연애결혼을 했는데, 이것저것 많이 따지는 우리 엄만 처음 만남에선 허락하시는 적이 없었다.
첫째 언니와 둘째인 나의 남자 친구들은 술 못 마시고, 말을 시켜보니 대답을 제대로 못하고 씩씩하지 못하다며 무지무지 반대하셨다.
남자란 자고로 술도 잘 마시고, 때론 뻥을 칠 수 있을 정도로 호탕해야 된단다. 등치도 커야하고.
그러시더니 이젠 어디를 가든 누굴 만나던 자랑이 늘어지신다. 내 첫째 사위가 삼부토건 사장이고 하시며, 다섯 번째 사윗감이 인사 왔던 날, 우리 엄마가 하신 말은 ‘이제 오다오다 별놈이 다 오네’였다. 다섯 번째 사윗감은 불란서 사람이었던 것. 한국말을 못하니 그저 엄마 손을 잡고 엄마 엄마만 외쳤었다.
그러셨던 나의 엄마가 이젠 기가 많이 죽으셨다. 자꾸 눈치 보시고 머뭇거리신다. 당황해 하신다. 그리고 얼마 전 하늘나라에 간 둘째사위 나의 남편 사진 앞에서 소리 없이 우시며 기도하신다. ‘이 사람아 왜 벌써 갔나. 그곳에서라도 내 딸을 보살펴 주게나’ 하시며.
옛날이나 지금이나 난 여전히 불효자식이다. 남편 떠난 자리가 너무 커서 사람 만나기 꺼려하며 일 끝나고 빈집에 들어설 때마다 막막하고 서럽던 마음이 엄마가 계셔서 많이 안정이 됐었는데, 어제 엄마가 가시고 나니 많이 힘들었었다. 하지만 엄마 나, 열심히 잘 살고 있을 테니까 내 걱정 그만하시고 엄마 자신이나 돌보세요.
이제 이 비가 그치면 추운 겨울이 오고, 눈도 올 테고, 그러다 보면 많이 지나 봄이 오겠죠. 그 때쯤이면 나도 옛날의 엄마처럼 씩씩하게 잘 살고 있을 테니까 아무 걱정마시고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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