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이여. 스페인의 고도 톨레도(Toledo)의 언덕에 섰습니다. 타호강이 휘돌아 흐르는 섬 같은 도성이 한눈에 내려다보입니다. 14세기 고딕식 대성당과 알카사르 성채가 가장 높은 산마루에 기념비처럼 우뚝 서있습니다.
K형. 톨레도는 옛 대학시절 기숙사 친구 방에 걸려있던 꿈의 성입니다. 조감도 사진엔 라틴어로 톨레툼(방어지대)이라고 적혀있었지요. 코발트빛 하늘과 검푸른 강줄기 품안에 새 둥지 같이 똬리를 튼 천연요새. 그 중세의 성을 향해 상상의 나래를 펴고 훨훨 날아가던 기억이 또렷합니다. 그 땐 이곳이 정확히 어딘지도 모르면서 나만의 동화 속 성채여서 참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그 옛 톨레도가 희미한 기억의 안개를 헤치고 눈앞에 펼쳐집니다. 왠지 낯익은 말발굽 아치문이 걸린 알칸타라 다리를 건너 언덕을 오릅니다. 이곳은 고대로마가 진을 친 이후, 서고트, 이슬람, 카톨릭 왕국을 거치면서 3,000년의 유적이 담겼다는 가이드의 설명을 새겨듣습니다. 비로소 내가 동화책 밖에 서있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먼저 산토 토메 성당에 도착했습니다. 1586년 엘 그레코가 그린 명화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을 보기 위해섭니다. 화집에서 익숙한 그림이지만 실제 상하 2단 구성의 대작을 대하니 세월을 초월한 그의 독창성과 표현력에 감전이나 된 듯 모두 침묵할 뿐입니다.
땅에서는 그가 매장되는데 천상에선 백작의 혼이 만유의 주재께로 올라갑니다. 그레코는 영혼의 승천을 그렸으면서도 ‘매장’이란 제목을 달아 육신의 한계를 일깨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그림 속에 담긴 우리 모두의 사후의 비밀을 바라보며 마음을 여밉니다.
그런데 톨레도는 자연미나 천상의 섭리와는 상관없이 전쟁과 살육의 상흔이 서린 도시였습니다. 알카사르(Alcazar)란 스페인 특유의 성채가 그 증거이지요. 이는 수도원, 병영, 방어진지가 복합된 건물이라고 합니다. 특히 1936년 스페인 내란 땐 육군보병학교의 본거지로 최대격전이 벌어졌던 곳입니다.
내란 당시, 이 전략적 요충지를 프랑코군 산하 모스카르도 대령이 이끄는 1600여명의 사관생도들과 민경대원들이 55일간 사수했다고 합니다. 대령의 어린 아들이 적군에게 인질로 잡혀 처형당하는 통첩을 받고도 굴하지 않은 이들의 투혼이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무용담을 들으며 가슴이 먹먹해 집니다.
K형, 과연 이념 앞에 애국의 정의가 무엇인지요. 역사상 프랑코파는 나치독일과 손을 잡았던 파시스트들입니다. 왠지 모스카르도 대원들이 파시즘을 지키려 했다기보다 이데올르기의 허울 속에 희생된 사람들이란 생각이 듭니다. 6.25때 납북되신 제 아버지도 그러셨지요. 이데올르기완 상관없이 고법판사의 직분을 끝까지 지키시다가 희생당하셨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민족주의 같은 이데올르기를 앞세운 전쟁은 허상인 듯 합니다. 나아가 인류가 인류를 학살하는 모든 전쟁자체가 선의 탈을 쓴 악의 실체라고 느껴집니다.
이런 생각은 마드리드에 와서도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프라도 박물관에서 고야의 그림- ‘1808년 5월 2일’ 앞에 섰을 때도 마찬가지였지요. 나폴레옹 군대에 항거하던 시민들이 총살되는 그림입니다. 게다가 소피아미술관에 걸린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보는 순간, 나치 독일의 폭격으로 죽어 가는 스페인 시민들의 절규 속에서 겹쳐지는 함성소리가 들렸습니다. 그것은 1492년 이후 스페인 군들에 몰살당한 아즈텍과 마야인 들의 통곡소리였지요.
형도 알다시피, 종교와 제국주의의 깃발아래 수백만 원주민들이 몰살되지 않았습니까. 16세기엔 데란다 주교에 의해 마야의 연대기가 모조리 불태워졌고, 모든 기록들은 마야의 상형문자를 해독 할 수 있는 열쇠와 함께 영원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찬란한 잉카와 마야의 황금들은 녹여져 세비야와 톨레도의 대성당을 장식했지요.
벗이여, ‘게르니카’에서 아즈텍과 마야인들의 통곡소리를 들은 사람이 어찌 저뿐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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