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있으면 직장을 그만둔다. 그리고 4년 만에 처음 휴가라는 것을 계획 중이다. 그동안 많은 도시들을 여행했지만, 항상 ‘출장’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어서 이번 휴가는 누가 말한 대로, 마른 선인장에 ‘듬뿍 물주기’가 될 터이다.
먼저 부모님이 계시는 한국의 전주를 방문해 물 좋은 재료로 손맛 있는 엄마가 해준 따뜻한 밥을 아침마다 먹을 것이며, 여기서 배운 ‘국적 없는’ 음식을 한국의 좋은 식재료로 저녁마다 부모님께 대접할 것이다. 하루를 한 시간씩 쪼개 사람들을 만났던 커피샵에서 이번에는 하루 종일 죽치고 앉아 책도 보고 창밖 거리를 걸어가는 사람들을 쳐다보고 미소도 지을 것이다.
인터넷으로 주문하던 책들을 이번에는 서점에 직접 가서 책 냄새부터 먼저 맡아볼 것이며, 한국에 갈 때마다 엄마 손에 맡겼던 아이 유모차도 이번에는 내가 직접 끌고 다닐 참이다.
이런 흐뭇한 계획을 하며 이 여행을 2주로 할지, 3주로 할지 마음속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던 중 몇 년 전에 세웠던 여행계획이 슬며시 생각났다.
2005년 당시 내셔널 지오그래픽 트래블러가 일생동안 가 봐야 할 여행지 50곳을 각 주제별로 선정한 적이 있다. ‘도시’라는 주제에는 바르셀로나, 홍콩, 이스탄불 등이 뽑혔고, ‘인간 비거주 공간’으로는 아마존 밀림, 남극 등이, 낙원으로는 이탈리아의 아말피 해안, 그리크 제도 등이, ‘전원지’로는 알프스 산맥, 캘리포니아의 빅서, 그리고 ‘세계의 경이’로는 캄보디아의 앙코르 와트, 만리장성 등이었다.
이름만으로도 화려하고, 잡지에 실린 사진만으로도 숨이 멎을 것 같은 압도적인 경관들이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나는 당시 이 50곳을 보면서 다른 곳을 상상하고 있었다.
잭 칼리라는 한 신문기자가 소말리아의 비극을 취재하다가 경험한 일이라고 한다. 금방 쓰러질 듯 뼈만 앙상한 소년에게 사과를 주자, 그걸 들고서 겨우겨우 집으로 가더니, 자기가 먹는 것이 아니라 오물오물 씹어서 옆에 쓰러져 있는 어린 동생의 입에 넣어주더라는 것이다.
일년 후 어린 동생은 살았고, 그 소년은 영양실조로 끝내 숨졌다고 한다. 당시 잭 칼리가 전한 한 장의 사진은 등뼈만 앙상한 소년이 축 늘어진 동생을 안고 있는 뒷모습이었다. 이 사진과 글은 며칠 동안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으며, 소말리아의 그 소년이 있는 곳을 꼭 방문하리라는 다짐을 했었다.
그 즈음에 한국의 한 TV에서 다큐멘터리로 제작한 재일교포 학생들의 조선학교 이야기를 접하였다. 이들은 일본에 살면서도 한국인으로 성장하고자 일본 정규학교가 아닌 조선학교를 선택한 것이다. 이 어린 학생들은 학교에서 친구들과 소소한 일상을 즐기는 한편, 사회적 편견과 차별이라는 거대한 구조 안에서 학교를 지켜야 하는 또 다른 임무를 안고 있었다.
일본 교육당국의 지원이 없는 가운데, 20여년은 족히 되었을 낡은 교재, 손을 호호 불어가며 연필을 잡은 고사리 같은 손, 점차 학생들이 떠나면서 휑하니 남아 흔들거리는 그네의 이미지는 한동안 내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에 첫 여행을 가게 되면, 그 소학교를 꼭 방문하리라 다짐했었다.
휴가를 계획하는 지금, 나는 내 인생의 여행지 50개 리스트 맨 위에 소말리아와 일본의 소학교를 올려놓고 싶다. 마음을 비우기 위한 곳, 마음을 살찌우는 곳, 마음이 곧 몸이 되는 곳으로 이후 48개를 쭉 채우길 기대하면서 말이다.
문선영 / 영화진흥위원회 미주 총괄매니저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