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종업원에 오랄섹스 강요한 사우디 왕자 보호 못받아
▶ ‘인신매매 혐의’ 인도 영사관 간부 사법처리 없이 본국 송환
‘면책특권’ 적용 범위와 사례
아주 오래 전의 일이다. 호주의 디에리 원주민이 서로 분쟁 중인 이웃의 식인부족에게 특사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두 부족 간의 해묵은 갈등과 다툼을 대화로 해결해 보려는 유화 제스처였다. 그러나 무조건 특사를 보낼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특사의 신변안전을 보장받아야 했다. 결국 두 그룹 사이에는 메신저를 죽이거나 삶아먹지 않는다는 묵시적인 합의가 이뤄졌다. 외교적 예전이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았지만 바깥 세상의 예법에 무지한 원주민들조차 외교관 면책특권의 초기형태를 시행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미국에서는 몇 달 전 카타르 국적의 남성이 페라리를 몰고 베벌리힐스 대로를 쏜살처럼 내닫다가 경관에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우디의 왕자로 밝혀진 이 남성은 베벌리 글렌의 정원에서 여성 종업원에게 오랄섹스를 강요하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을 피해 도주하는 중이었다.
외교관들에게 신변안전을 보장해 주고 사건 발생 때 체포나 기소로부터 보호해 주는 면책조항은 이미 오래 전부터 국제관계를 원활하게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으로 간주되어 왔다.
국제관계 버클센터의 디렉터인 칼 라우스티아라는 “주재국에서 외교관이 협박을 받게 된다면 효과적으로 공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베벌리힐스 카레이싱 사건에 연루된 카타르 왕족 셰이크 갈리드 빈 하마드 알 탄트와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인 마제드 아브두라지즈 알 사우드는 둘 모두 면책특권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타니는 재빨리 국외로 도피했고 알사우드는 30만달러의 보석금을 물고 풀려났다.
면책특권이 가장 무자비하게 훼손한 사례로는 1979년 이란의 테헤란 주재 미대사관에 이슬람 급진주의 대학생들이 난입한 사건이 첫 손가락에 꼽힌다.
당시 이슬람 운동권 대학생들은 대사관 안에 있던 수십명의 미국인들을 444일 동안 인질로 잡아 둔 채 카터 행정부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당시 카터 행정부는 야만적인 국제법 위반행위라며 즉각적인 인질 석방을 요구했지만 이란의 정신적 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의 수중에 들어간 정부는 학생들의 행동을 공식적으로 지지했다.
외교관들에게 제공되는 법적 보호장치는 주재국의 법과 개인의 권리를 무시하는데 악용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보자. 지난 2010년, 미 연방 보안관실은 항공기 기내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던 카타르 남성을 체포했다. 검거될 당시 이 남성은 “구두 밑창에 불을 붙이려 했다”고 농담을 했다. 구두폭탄테러를 빗댄 농담이다. 국내 여론이 들끓은 것은 두 말할 여지가 없다. 외교관 신분 때문에 카타르 외교관은 기소를 면했지만 곧바로 본국 정부로 소환 조치됐다.
2013년에는 미국과 인도 사이에 외교적 마찰이 일어났다. 미 연방 외교 보안서비스국의 요원들은 뉴욕 주재 인도 영사관의 고위 여성간부를 비자사기 및 문서위조 등의 혐의로 체포했다. 문제의 외교관은 가사도우미로 고용한 여성에게 지불한 임금의 액수를 허위로 신고했다.
영사관 직원들은 공무 수행 중 발생한 사건에 대해서만 면책특권을 적용받는다. 따라서 미국 측 관리들은 그녀의 위법행위가 업무수행과 관련 없는 영사관 외부에서 일어났다는 점을 물고 늘어졌다.
그러나 자국 여성 외교관이 체포돼 알몸수색들 받았다는 소식에 인도인들은 격분했고 양국관계는 냉랭해졌다.
인도 정부는 그녀의 완전사면과 함께 문제의 여성 외교관이 가사도우미를 인신매매한 것으로 규정한 미국의 담당검사들에게 무조건 사과를 요구했다.
결국 연방 대배심에 의해 기소를 당한 여성 외교관은 사법적 처리를 받지 않은 채 본국으로 송환됐다.
여기서 궁금한 점은 외교관에게 부여되는 면책의 수준이다. 1961년 비엔나 외교관계 컨벤션 규약에 따르면 워싱턴 주재 대사관의 대사와 그의 가족은 최고 등급이 면책특권을 누린다.
기술 인력과 행정 스태프에게는 그 아래 단계의 보호막이 제공되고 용역 스태프가 최하 수준의 보호를 받는다. 최고단계의 절대적 면책권의 적용을 받는 사람은 설사 살인을 저질렀다 해도 주재국 정부의 사법처리를 받지 않는다.
그러나 국가 사이의 관계를 고려해 상대국 정부가 면책특권을 풀어주는 경우도 없지 않다. 1977년 전 소련연방국 회원국이었단 그루지야의 외교관은 워싱턴 듀퐁서클에서 차가 미끄러지면서 마주오던 차량과 충돌했고 이로 인해 메릴랜드의 10대 소녀가 현장에서 숨졌다.
관계자 처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비등하자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간절히 원하던 그루지야는 외교관에 대한 면책권을 일찌감치 포기했다. 이 남성 외교관은 단기 7년, 장기 21년의 형량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2012년에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도미니크 스트라우스-칸 IMF 총재의 호텔메이드 성폭행 사건이 워싱턴에서 터져 나왔다.
프랑스 대선의 가장 유력한 주자 중 한 명으로 물망에 올랐던 스트라우스-칸 IMF 총재는 서둘러 총재직을 사퇴했고, 피해여성은 기다렸다는 듯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비엔나 컨벤션은 범법을 저지른 외교관이 공직에서 물러날 경우 일정기간 외교면책권을 부여한다는 조항을 담고 있다. 그러나 뉴욕의 판사는 스트라우스-칸에겐 이 조항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정부의 첩보요원들이 연루된 케이스도 적지 않다. 2011년 파키스탄의 미국 대사관에서 참사관으로 근무 중이던 중앙정보국(CIA) 비밀요원이 백주 대낮에, 그것도 인파로 붐비는 도심 대로에서 2명의 현지 남성을 사살했다. 레이먼드 데이비스로 신원이 밝혀진 남성은 체포돼 지역 경찰에 넘겨졌다.
그가 구금되어 있는 동안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필두로 미국이 고위 관리들은 파키스탄 측에 그가 “당시 공무를 수행 중이었다”며 무조건 석방을 압박했다. 결국 피의자는 유족들에게 금전적 보상을 한다는 조건으로 풀려난 후 미국으로 빠져나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한때 철옹벽 같았던 면책권도 조금씩 힘을 잃어가고 있다. 이제는 소화전 앞에 불법주차를 한 외교관은 티겟을 피할 수 없다. 물론 벌금을 무는 외교관도 거의 없는 게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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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경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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