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라 자스마 ‘그림자박스’(2009)
우연히 들른 캘스테이트 롱비치 대학의 넓은 풀밭에서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축제를 보았다. 깃털과 방울로 장식한 현란한 의상의 군무가 펼쳐졌는데 화려하고 격렬한 춤과 소리가 어찌나 강렬한지 아직도 눈에 선하다.
태양을 기리는 축제이기에 태양에 비견할 만큼 아름답게 장식한 의상을 입는다고 했다. 곳곳에 전시한 장식품의 판매와 함께 사라져 가는 종족의 사활을 건 축제로 여겨지며 무척 귀한 문화유산이구나 싶었다.
지난 LA 아트페어에서 바나나 잎사귀를 접어 엮은 듯한 갈색 의상으로 온 몸을 가린 한 사람의 사진이 흥미로웠다. 눈 주위만을 드러낸 의상이 마치 장군의 갑옷 같기도 하고 나뭇잎 우비를 입은 것 같기도 했다. 도대체 왜 이런 옷을 만들어 입고 있으며 무엇을 얘기하고자 하는가가 궁금하여 라시에네가 거리에 위치한 수잔 백의 화랑에 찾아가 그 작업을 한 작가에 대해 물어 보았다.
이름도 생소한 멜라 자스마(Mella Jaarsma) 라는 여성의 작업이었고 지난 20여년 인도네시아에서 작업하고 있는 홀란드의 작가라고 했다.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에 거주하는 이민 작가인 나의 흥미를 끈 것은 그녀가 유럽인으로서 인도네시아에 이민하여 인도네시아의 풍속과 종교 사회 문제들을 다루며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을 작품의 주제로 삼는다는 점이었다.
시골에서 자라나 미국의 대도시로 이주해 온 나와는 반대로 유럽 현대문명을 떠나 인도네시아의 작은 마을로 들어가 작업을 하는 작가이기에 내가 막연히 그리워하는 시골의 풍속과 정서가 느껴져 매력을 느낀다.
봄이면 친구들과 나물을 캐러 다니고 여름에는 맑은 개울에서 머리를 감고 물고기를 잡으며 매미소리를 듣던 어린 시절처럼 언젠가 자연 속에서 흙담집을 짓고 살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을 그녀의 퍼포먼스 작업들이 다시 일깨워준다.
무척 복합적이고 철학적인 그녀의 사고의 흐름이 외양에서는 나뭇잎, 가죽, 나무, 숲, 사찰, 천막천 등의 자연스러운 소재와 다양한 인종의 토속적 일면을 보여주지만 그녀가 다루는 주제는 마치 인류학자의 연구처럼 사회적, 정치적 터부와 이슈를 예민하게 다루고 있다.
이질적 사회에서 백인여성이 겪는 편견과 긴장이 나는 누구이며 다른 세계의 사람들은 나를 어떤 사람으로 어떻게 바라보는가, 우리는 다른 세계의 다른 종족과 어떻게 공존해 나갈 수 있는가의 무척 광범위한 문제를 시각적 이미지와 행위로 다루며 그녀만의 제의적 의식(Ritual)을 창조해 왔다.
‘나는 빛과 그림자에 매료되어 처음 인도네시아에 갔다’라는 문장으로 그녀의 이민을 기억하는데 ‘그림자박스’<사진>라는 멋진 퍼포먼스 작업으로 형상화했다. 4마리의 예지적 동물이 삶을 인도한다는 인도네시아의 신화를 주제로 한 작업이다. 커다란 박스 형의 흰 의상에 조명장치로 이 세계와 이 세계 이면의 다른 세계를 감지하는 빛과 그림자의 흐름을 표현했다.
나의 경우 처음 미국에 도착해서 몇 년간 느낀 두렵고도 차가운 세상이라는 느낌을 몸의 크기만한 얼음 위에 누워 또 다른 얼음을 가슴에 안고 녹이는 작업으로 표현한 적이 있다. 차가운 세상을 뜨거운 가슴으로 녹이겠다는 극한적 행위였는데 생생하고 활기찬 삶을 상징하는 토끼 한 마리를 화랑에 놓아두었었다.
차가운 얼음이 관객의 시선과 퍼포먼스 열기로 차갑게 느껴지지 않는 신기한 경험을 했었는데 몇 10년이 지난 이제는 편안하여 봄이 와 흐드러지게 핀 목련 꽃과 매화꽃을 바라보며 걷는 아침 산보 길에 캘리포니아의 햇살과 자연에 커다란 은총을 느낀다. 다른 세계에 동화 되었다기보다는 그냥 멀리서 바라보며 미국이라는 나라에서의 삶을 지나온 것 같기도 하다.
멜라 자스마의 시선에 그토록 신기했던 인도네시아인의 삶과 문화처럼, 오랜 외지생활 끝에 새로운 시각으로 깨닫는 타인들의 문화와 우리 문화의 신화들을 다시 찾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들은 모두 자신의 삶의 이야기로 자신만의 신화를 살아내고 있다.
<
박혜숙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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