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간독자 VA 이규원 씨의 남다른 한국일보 사랑
▶ 반세기동안 한결…유창한 영어 불구 한인신문 고집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반세기 동안 워싱턴 한국일보를 구독해온 독자가 있다. 버지니아 페어펙스에 거주하는 이규원 씨(80, 사진)가 주인공이다.
“워싱턴에 한국일보가 본격 창간된 때가 1971년이었는데 그 전에는 노스웨스트 항공편으로 한국일보 본국지를 받아 가위로 광고란을 오려내고 이 지역 내용으로 바꾼 다음 복사해 배부했어요.”
창간호 당시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해내는 이규원 씨는 부인과 부부의 연을 맺어준 장소도 서울의 한국일보 본사 근처였다고 본보와의 특별한 인연을 털어놓았다.
“떠올려보니 아내를 처음 만난 곳도 안국동 한국일보 앞 다방이었어요.”
청춘을 회상하는 그의 얼굴에서 아련함이 피어났다. 당시 한국일보 본사에 근무했던 아내를 소개 받아 결혼한 뒤로 한국일보는 이 씨 부부의 인생의 정겨운 반려자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배달된 한국일보를 가지고 들어옵니다. 하루일과를 한국일보와 함께 시작하는 거지요. 아침을 먹으며 특별한 소식이 있나 훑어보고, 식사 후 거실에 앉아 좀더 자세히 봅니다. 언제나 거실 테이블에는 한국일보가 놓여있고, 차를 마시거나 시간이 날 때마다 읽고 또 읽어요. 자기 전에 신문을 치울 때까지 말입니다.”
이규원 씨 부부의 남다른 한국일보 사랑은 미 주류사회 직장에 근무하면서도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젊어서부터 영어 가르치는 일을 해온 이규원 씨는 영어가 유창함에도 신문은 한국일보만 선택했다.
“워싱턴 포스트가 필요치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세계와 미국, 워싱턴 지역 뉴스에 고국 소식까지 한국일보가 전해주는데 구태여 어려운 영자신문을 볼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몸은 미국에 와 있지만 마음 한 곳에 늘 한국이 있고 여동생, 처남 등 가족들이 아직 고국에 있는데 어찌 궁금하지 않겠습니까? 그 궁금증을 우리 곁의 한국일보가 풀어주어 좋았습니다.”
한 번은 다른 신문사 직원이 구독을 권유하기 위해 찾아왔다고 한다. 자기들 신문으로 바꾸면 1년간 무료구독 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그러나 이규원 씨는 단호히 거절했다.
“한국일보만 그렇게 좋아했어요. 그래서 여행기나 산행에 관한 글을 써 게재한 적도 꽤 있답니다.”
1938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난 이규원 씨는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진해 해군사관학교에서 영어교관으로 복무했다. 1972년 조지타운대학교 대학원에서 언어학 석사 학위를 받은 후 극동아시아과장으로 근무했고, 아메리칸대학에서 ‘한국문화’를 가르치기도 했다. 1974년 미 광산노조 기금회사에 입사해 32년을 근무했고, 현재 KCPC 부설 중앙시니어센터와 메시야장로교회 평생교육원에서 영어교육 봉사자로 있다.
“돌이켜보면 나의 미국생활은 곧 한국일보와의 추억들입니다. 달고 쓴 인생의 모든 순간에 한국일보가 함께 있었기에 더없이 소중한, 내 인생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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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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