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우거진 조지워싱턴 파크웨이를 타고 퇴근하는 길이었다. 갖가지 나무에 울긋불긋 단풍이 들어 깊어진 가을의 정취를 클래식 라디오방송에서 흘러나오는 바이올린 선율이 더하고 있었다. 선율이 끊기며, 휴대전화에 연결된 블루투스를 통해 콜로라도에 사는 친구의 음성이 나왔다. “내가 웬만해선 부담 지우고 싶지 않아서 기도 부탁을 잘 안 하는데, 자식 일이라 너무 간절해서 이렇게 전화를 한다.”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
그 친구의 둘째 아이 P는 내 둘째와 동갑내기로 고등학교 10학년이다. 10학년으로 올라가면서 P는 학교를 바꾸었다.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온 가까운 학교 친구들이 마리화나를 상습적으로 피우게 되자, 내 친구는 P의 학교를 바꾸어 그 아이들과 거리를 두게 했다. 콜로라도는 마리화나를 합법화한 후 누구나 쉽게 마리화나를 접할 수 있어 그 유혹이 엄청나다고 한다. 새로운 학교로 옮겨간 후 모든 것이 낯설어 힘든 상황에, 설상가상으로 얼마 전에는 한 백인 남학생이 P를 불러 세워 “헤이 아시안, 네 나라로 돌아가라! Go back to your country!”고 했다는 것이다. P는 미국에서 나고 자란, 미국이 고향인 아이다. “얘, 애가 그날 겪은 일을 얘기하면서 너무 무서웠다고 울더라.”
학교에 보고를 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고 물으니 더 서글픈 답이 돌아왔다. “나도 똑같이 아이에게 물었어. 근데 애가 뭐라고 대답한 줄 아니? 애가 캐버노 청문회 때 포드 교수 얘길 하더라. 증거가 없으면 결국 피해자만 더 피해를 보고 더 큰 어려움만 겪게 된다고. 증거도 없는 아시아 학생 말을 누가 들어주겠냐고. 애라고 세상일은 모를 줄 알았는데, 어쩌면 어른들의 이 부끄러운 세상 일을 다 알고 아시아인이 아무 힘이 없다는 걸 벌써 받아들이는데 뭐라고 해 줄 수 있겠냐.”
2018년이다. 1960년대도 아니고. 1930년대 독일에서 유대인에게 노란 리본을 달아 구분할 때와 뭐가 다른가.
유대인은 피부색으로, 외관으로 구분할 수 없어 노란 리본을 달았으나 아시아인이나 흑인, 남미인을 차별하는 데는 그런 리본도 필요치 않다. 차별을 당해도 호소할 곳도 없다. 우리 자식들에게 미안해졌다. 어쩌다 이 나라가 이 이 지경이 되었나.
우리는 또 이런 세상에 왜 이리 무력한가. 못난 부모를 만나 아이들이 상처를 받고 하소연할 곳도 없이 위험에 방치된 채 남겨져야 한단 말인가. P의 아픔이 내 자식의 아픔인 양 내 가슴을 저몄다.
수 백 년 간 더욱 참혹한 차별을 당하고 그런 고난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싸워온 많은 이들의 용기를 일깨워주는 것이 도움이 될까. 내가 실천하지 못하는 용기를 내 아이들에게 지워주며 요구한다면 얼마나 염치없고 부끄러운 일인가. 집에 돌아와 저녁 내내 나는 또렷한 답을 찾지 못한 채 답답한 가슴을 안고 맥아더 장군의 <자녀를 위한 기도>를 읽는다.
약할 때 자기를 분별할 수 있는 힘과 / 두려울 때 자신을 잃지 않는 담대함을 가지고 바랍옵기는 그를 평탄하고 안이한 길로 인도하지 마시고 고난과 도전에 대하여 분투 항거하도록 인도하소서./ 그리하여 폭풍 속에서 용감히 싸울 줄 알고 패자를 긍휼히 여길 줄 알도록 하소서.
창밖에 힘없이 떨어지는 낙엽과 스산한 가을 밤바람 소리가 가슴을 더욱 저민다.
<송윤정 워싱턴 문인회 맥클린, VA>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