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치에서 보수와 극우는 기득권 유지를 위해 ‘색깔론’을 적극적으로 부추기며 정치적으로 이용해왔다. 이들은 마치 전가의 보도를 휘두르듯 필요할 때마다 색깔론 공세를 펴는 방식으로 국민들의 잠재의식 속 ‘레드 콤플렉스’를 자극했다. 특히 선거 때만 되면 색깔론은 어김없이 기승을 부렸다. 그리고 상당 기간 색깔론은 보수 극우세력의 정치적 의도를 충족시켜주는 아주 효과적인 전략이 돼 주었다.
색깔론이 한국사회에서 그토록 오랜 기간 잘 먹혀 온 데에 분단이라는 한국의 특수상황이 작용했음을 누구나 알고 있다. 남북이 이념적으로 또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은 상대를 ‘붉은 색’으로 포장하는 전략의 위력을 한층 더 배가시켰다. 극우보수 세력이 색깔론을 제기하고 생산해 내면 극우보수 언론들이 이를 적극 유포하는 방식으로 색깔론은 한국정치를 장악했다.
색깔론의 역사적 기원과 실체를 추적해보면 그 배후에는 친일세력이 자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친일세력에게는 해방 공간에서 자신들의 반민족 이력을 세탁해주고 잽싸게 친미세력으로 둔갑시켜줄 도구가 필요했다 이 역할을 해준 것이 반공 이데올로기에 바탕을 둔 색깔론이었다. 이들의 색깔론은 이후 수십 년에 걸쳐 친일세력과 독재정권 사이의 유착을 강화시키고 지속시켜주는 접착제가 되었다.
예일대 사학과 교수인 티모시 스나이더는 진실을 훼손하는 방식의 하나로 ‘샤머니즘적 주문’을 든다. 끝없는 반복을 통해 허구를 그럴 듯하게 변모시킨다는 것이다. 반복적으로 제기되는 색깔론에 레드 콤플렉스에 취약한 국민들은 쉽게 흔들리고 잘 속아 넘어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인 지금은 색깔론의 약발이 과거처럼 먹혀들지는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철 지난 색깔론에 점점 더 많은 국민들이 식상해하고 있다. 더 이상 과거처럼 색깔론에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시대착오적인 색깔론이 사라져야 한다는 당위론적 희망을 갖기에는 아직 이른 것 같다. 색깔론이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가운데서도 여전히 보수극우 세력은 색깔론 공세에 매달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대선출마를 공식선언한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지난 주 “대한민국이 친일청산을 하지 못하고 친일세력들이 미 점령군과 합작해 사실상 지배체제를 그대로 유지하지 않았느냐”는 발언을 하자 보수극우 정치인들이 ‘미 점령군’이란 표현을 문제 삼아 대대적인 이념 공세에 나서고 있다. 특히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한술 더 떠 “미군은 점령군, 소련군은 해방군이란 황당무계한 망언을 집권세력의 유력후보가 이어받았다”며 “이들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세력”이라고 비난했다.
윤석열의 비난은 기본적으로 심각한 하자를 안고 있다. ‘점령군’이란 표현은 미군의 포고령에 등장하는 문구이다. 미군 스스로가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심지어 보수극우 세력이 ‘구국의 영웅’처럼 추앙하는 백선엽이 편찬한 ‘6.25전쟁사’에도 점령군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윤석열은 자신의 역사지식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드러냈다. 지식이 부족하면 신중하기라도 해야 할 터인데 윤석열은 논리의 비약을 통해 집권세력 전체에 색깔론의 딱지를 붙이려는 저급한 의도를 드러냈다. 윤석열이 장모 실형선고 국면에서 벗어나려는 조급증에서 색깔론을 들고 나온 것으로 보이지만 패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갓 정치에 발을 들인 정치 신인이 새로운 정치를 표방하기보다 과거의 음습하고 어두운 정치적 유물인 색깔론에 기대려하는 모습은 안타깝다. 그는 내년 대선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해야 한다고 누누이 밝혀왔다. 하지만 이번 발언에서 드러난 그의 극우적 역사인식과 부족한 인문적 식견은 대선압승에 필수적인 중도표심을 유혹하는데 아주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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