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0년대 전설적 밴드 ‘슬라이 앤드 더 패밀리 스톤’ 이끌어
▶ 약물 중독으로 얼룩진 삶…전성기엔 “’흑인 비틀스’ 보는 듯” 평가도

미국 음악가 슬라이 스톤[로이터]
1960∼1970년대 미국의 전설적인 펑크록 밴드 '슬라이 앤드 더 패밀리 스톤'의 리드 싱어로 펑크록 대중화를 이끈 음악가 슬라이 스톤이 9일(현지시간) 로스앤젤레스(LA)에서 82세를 일기로 별세했다고 로이터, AFP 통신 등 외신들이 보도했다.
스톤의 가족은 이날 성명에서 그가 만성 폐쇄성 폐 질환 등으로 투병한 끝에 세 자녀와 가까운 친구, 친척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고 밝혔다.
스톤은 1960년대 말∼1970년대 초까지 미국에서 정상급 인기를 누렸던 밴드 '슬라이 앤드 더 패밀리 스톤'의 리드 싱어이자 작곡가다.
스톤이 1966년 결성한 이 밴드는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혼성 밴드이자 흑인과 백인 음악가가 함께 참여한 밴드로도 화제를 모았다.
밴드의 히트곡인 '댄스 투 더 뮤직'(Dance to the Music), '패밀리 어페어'(Family Affair), '아이 원트 투 테이크 유 하이어'(I Want to Take You Higher) 등은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미국 각종 음악 차트를 휩쓸며 인기를 끌었다.
스톤의 음악은 당시에는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음악 장르인 펑크록을 기반으로 알앤비, 소울, 고스펠, 사이키델릭 등 다양한 장르를 결합한 실험적인 색채로 호평을 받았다.
기존 사회 질서에 저항하며 전쟁 반대와 민권 향상을 주장했던 1960년대 미국의 히피 정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음악이라는 평가도 받는다.
1969년 미국 히피·록 문화를 상징하는 음악 축제인 '우드스톡 페스티벌'에서 스톤이 40만 명이 넘는 관객 앞에서 선보인 무대는 아직도 전설로 회자 된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 미국 사회에 이러한 이상주의적 시대 정신이 사그라들고, 정치적 양극화와 인종 갈등의 그림자가 드리우자 스톤의 음악도 함께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이 시기 스톤은 무대에서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거나 공연에 아예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늘었고, 밴드도 결국 해체됐다.
1970년대 후반 들어서 스톤은 마약류 소지 혐의로 여러 차례 체포됐으며 이후 다시는 예전의 명성을 회복하지 못했다.
다만 그가 남긴 음악은 이후에도 여러 힙합 가수들이 자신의 곡에 샘플링으로 활용하는 등 후대에 계속 영향을 미쳤다.
스톤의 밴드 '슬라이 앤드 더 패밀리 스톤'은 1993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2006년 그래미상 시상식에서는 스톤을 기념하기 위한 헌정 무대가 마련되기도 했지만, 당시에도 스톤은 노래 도중 갑작스럽게 무대를 떠나 대중을 당황하게 했다.
스톤의 오랜 친구이자 같은 시기 활동한 펑크록 가수인 조지 클린턴은 과거 한 인터뷰에서 스톤의 무대는 "비틀스의 흑인 버전을 보는 것 같았다"면서 "그는 거리와 교회, 또 모타운(잭슨파이브 등이 속했던 전설적인 흑인 음악 레이블)의 색채와 같은 감각을 모두 지녔다"고 평가했다.
스톤의 가족은 이날 성명에서 "우리는 그의 부재를 애도하는 한편, 그의 독창적인 음악적 유산이 여전히 남아있고 후대에도 계속 영감을 줄 것이라는 사실에서 위안을 구한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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