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로봇 등 첨단산업의 급성장과 함께 반도체의 전략적 가치가 높아지는 가운데 미국과 유럽 등 주요국이 자국 중심 반도체 공급망 재정비에 속도를 내고 있다. 기존에는 글로벌 반도체 기업 유치에 방점을 찍었다면 지금은 자국 기업 육성 및 반도체 인프라 확보에 힘을 쏟고 있다. 특정 국가에 집중된 생산구조에 따른 리스크가 확인된 데다 반도체 경쟁에서 도태되면 첨단산업에서 승산이 없다는 판단이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1일(현지 시간) 니혼게이자이신문 등에 따르면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유럽 반도체법(EU 칩스법) 개정 작업에 착수했다. 역내 기업들의 연구개발(R&D) 지원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칩스법 2.0’을 마련하겠다는 구상이다. 기존 법안이 글로벌 반도체 기업의 공장 유치에 주력했다면 새 법안은 공급망 안정과 기술력 강화를 위한 유럽 기업 중심 지원이 핵심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EU는 2023년 총 430억 유로(약 73조3,000억 원) 규모의 투자 계획을 담은 반도체법을 제정하며 당시 8% 수준이었던 글로벌 시장 점유율을 2030년까지 20%로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하지만 인텔이 독일 신규 공장 건설 계획을 철회하는 등 주요 프로젝트가 연달아 무산되면서 외국 기업에 의존한 정책이 한계를 드러냈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EU는 산업계 제반 의견을 듣고 정책 방향을 재정비하는 상황이다. 현재 유럽 반도체 업계는 현행 예산의 약 4배에 달하는 200억 유로(약 34조1,000억 원) 규모의 R&D 지원을 요구하고 있으며 집행위도 이를 적극 검토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유럽 반도체장비협회는 “단순히 첨단 공장을 유치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네덜란드의 ASML처럼 유럽이 강점을 가진 분야에 전략적으로 투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은 반도체 등 전략산업에서는 강력한 ‘아메리카 퍼스트 전략’을 펼치고 있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 반도체 기업 인텔의 최대주주로 올라선 것이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미국 정부는 인텔 보통주 4억3,300만 주를 주당 20.47달러에 매입해 인텔 지분 9.9%를 확보했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AI 칩 분야에서 경쟁력이 약화되며 경영난에 빠졌던 인텔에 미국 정부가 직접 주주로 나서 미국 반도체 제조 역량을 확보하겠다는 목적이다.

또 미 상무부가 1억5,000만 달러를 투입해 첨단 반도체 레이저 기술 스타트업 ‘엑스라이트’의 지분을 취득하기로 합의했다고 로이터통신이 1일 보도했다. 엑스라이트가 개발 중인 레이저는 첨단 반도체 공정에 필수적인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에 들어가는 고난도 기술이다. EUV 노광 장비는 네덜란드의 ASML이 사실상 독점 생산한다. 이와 함께 전임 조 바이든 행정부가 추진했던 외국 기업 대상 보조금 체계도 대폭 손질할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은 일찌감치 ‘중국 제조 2025’ 프로젝트를 통해 반도체 자립률 70% 달성을 목표로 대규모 투자를 이어왔다. 미국과의 기술 패권 경쟁이 격화하는 가운데 중국은 파운드리·메모리·전력반도체 등 다양한 부문에서 국산화 성과를 보이고 있다. 미국 반도체산업협회에 따르면 중국의 세계 반도체 생산능력 점유율은 1995년 3%에서 올해 24%까지 확대될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경제=이완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