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오는 밤의 마력을 아시는지?
요즘 뉴욕의 날씨는 계속 흐리다. 지난주에도 비가 오더니 이번 주에도 비가 내리고 있다. 얼마전 일요일 밤, 잠을 자다가 무언가 귓전을 간지럽히는듯 사락사락 하는 소리에 일어나 거실로 나가보니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내려다보이는 주차장의 차량마다 머리에 흰 눈을 이고 있더니 금새 비로 변하였다. 해갈되는 몸에서 나오는 대지의 입김을 감지하며 유리창 안쪽에서 소리 없이 내리는 비를 한참동안 쳐다보았다.
비 내린 다음날 거리는 말끔히 세수한 얼굴이고 공기는 더욱 투명하니 맑다. 출근길에 마주 대하는 바람은 매운기를 걷어버리고 알 수 없는 그리움을 아련하게 한 뭉치 던져주고 홀연 사라져버린다.
그 풀린 바람결에 묻어 아주 오래 전 대학 시절 친구 얼굴이 머리에 떠올랐다. 늘 붙어 다니는 4명의 친구 중 한 명인 그녀는 졸업과 동시에 결혼을 하고 우리들 주위에서 사라져버렸다. 지방 유지의 아들과 결혼하고 친구들과 연락을 끊어버린 그녀.
그녀를 이해 못하다가 20년이 지난 비 내린 다음날 아침, 물오르는 나뭇가지를 보면서, 곧 새하얀 목련도 피어오르고 보라색 라일락도 피겠지 하다가 아마도 그녀는 젊은 시절 열애를 혼자의 가슴속에 영원히 간직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예쁘고 순수한 연애를 했던 그녀, 찰랑거리는 단발머리를 했던 남자친구에게 예쁜 핀을 사다주며 꽂으라고 했던 그녀, 미소년 아도니스처럼 생긴 그 남자 옆에 영화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오드리 헵번처럼 숏 커트 머리, 소매를 걷어올린 남방, 허리를 졸라맨 롱스커트 차림으로 그림자처럼 서있던 그녀.
그녀는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하는 박인희 노래 ‘세월이 가면’을 잘 불렀다. 생긴 것도 이름도 시인처럼 분위기 있던 남의 애인 얼굴과 이름은 왜 이렇게 잘 기억나는지.
그녀는 이별로 끝난 열애를 가슴 한 켠에 묻어두고 평생을 조금씩 아껴가며 외로울 때, 힘들 때, 슬플 때 꺼내보며 살고싶었던 것일까.
그 연애의 기승전결을 아는 우리들이 그 소중한 기억을 아는 척 할 사람도 아니지만 혼자서 가슴속에 매장한 마음을 생각하니 그녀의 연락두절을 이해 못할 것도 아니었다.
봄이 왔고, 모든 사물이 활기를 찾아 생동감 있게 튀어 오르듯, 미풍의 간지러움에 날아갈 듯 가벼운 몸짓으로 사랑하고픈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뉴욕 시티 오페라단도 봄 시즌 공연을 막 올려 한창 공연 중인데 15편의 레퍼토리가 거의 모두 사랑을 다루고 있다.
정열적인 짚시 여인 카르멘과 호세의 비극적 사랑을 다룬 ‘카르멘’, 로미오와 줄리엣을 원작으로 한 ‘캐퓰렛가와 몬태규가’, 여성을 찾아 헤매는 팔난봉꾼 이야기인 ‘돈 죠반니’, 휘가로와 수잔나·바람기 심한 알마비마 백작의 ‘피가로의 결혼’, 해군 대위와 게이샤의 사랑을 그린 ‘나비부인’, 동백꽃 부인 비올리타와 순박한 시골청년 알프레도의 비애를 담은 ‘라 트라비아타’, 가난한 시인 루돌프와 병이 든 미미의 슬픈 이야기 ‘라보엠’ 등등 대부분의 오페라가 사랑과 배신, 희망과 절망 등 인생의 희노애락을 다루고 있지만 이번 봄 시즌에는 유독 감미로운 음악과 비극적 사랑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그 중 지난 토요일에 본 ‘토스카’ 3막에서 죽기 직전 토스카와의 사랑을 되새기며 부르는 화가 카라바도시의 “별은 빛나건만” 아리아는 가슴을 울렸다. 남자 주인공이 새벽별 아래 흐느끼며 부른 그 노래 한 곡으로 이번 봄맞이는 잘 한 듯싶다.
맨하탄 극장가에 가기가 쉽지 않은 사람은 한국에서 한창 인기 있었던 드라마 ‘겨울연가’를 보며 대리만족을 느껴도 아쉬운대로 괜찮다.
설경과 첫사랑을 담은 드라마를 보며 이십대를 한국에서 보낸 중년들은 겨울의 경춘선과 춘천 소양호, 찻집 이디오피아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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