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스님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단순함이나 소박함이야말로 진정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이다. 지지난해 막내딸 아이의 첫아기 산달이 정해졌을 때 우리 부부는 몇 달 전부터 집 안팎에 페인트를 칠하고 새 카펫도 깔았다. 단 한 달이라도 산후조리를 시켜 보내려고… 그 때 얼마나 많은 것들이 집 안팎으로 쏟아져 나왔는지. 정말 이렇게 많은 것들이 필요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많은 것들을 챙겨 갖고 있었는지.
이삿짐을 챙기려니 책들이 문제 투성이다. 은퇴를 하면 책만 읽고 음악만 들으면서 지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던 생각은 이민 와서 세 아이들을 대학만 졸업시켜 놓으면 모든 것이 끝이 날 것 같았던 생각 등 모두가 착각이었다. 방황하는 사춘기는 다독거려 주는 부모가 있어서 그래도 잘 정돈될 수 있다지만 혼돈스럽고 또 다른 의미의 방황을 해야 하는 중년기의 부모는 그 누구도 앞가림해 줄 수 없는 오직 그 자신의 문제일 뿐이었지만 그럭저럭 잘 지나온 것 그 모두가 신의 축복일 수밖에 없다.
이사를 간다면서 웬 고추 모종한다고 야단이냐 하던 친구는 뒷마당에 주렁주렁 달린 고추를 보고 "뭐, 지구의 종말이 와도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사람도 있었는데…"라던 내 말에 웃었지만, 진정 그 말의 행복을 나는 한 소쿠리 고추를 따서 남편 친구에게 그리고 집에 들른 며느리에게 맛보게 하며 느낀다.
옆 자락에 심었던 홍화의 노란 꽃들도 빨갛게 변하여 씨 주머니를 골무만큼 크게 안고 있어서 모두 따서 소쿠리에 말려 어제는 비닐 백에 넣고 밟아서 오늘은 씨를 털어내 병에 넣어 ‘2002년 홍화씨’라고 적어 놓고 남편을 위해 나를 위해 차를 끓일 것이고 또 그 누군가 심고 싶다면 은수저 한 두개쯤의 홍화씨를 나누어줄 것이고… 몇 자루 수염을 달고 서있는 찰옥수수는 이제 오는 사람들에게 남겨줘야 하겠고… 작년에 따두었던 빨간 고추는 꼭지를 따서 모두 비닐 백에 넣어 망치로 부수어서 굵은 고춧가루를 만들어 국물김치에 넣거나 찌개용으로 쓸 것이고…
책! 나에게는 자식과 남편 다음으로 위로 받고 사랑하는 존재 같은 것! 버릴 만큼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한 권의 책도 버리지 못한 나에게 화내는 남편과 아이들을 이해해 보려니 눈물이 나려 한다.
큰맘 먹고, 토요일 하루를 택해 근처 도서관에 전집과 잡지 등등 서너 번 왔다갔다 옮겨 주었다. 은퇴하고 그래서 틈나면 걸어서 몇 시간씩 쉬고 올 수 있었던 아늑한 곳, 그 곳에 나의 손때 묻은 책들이 가지런히 정리 될 것을 생각하니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참, 행복한 아침이다. 남편이 끓여온 커피 한잔 아름답게 마시고 다시 또 버리고 그리고 떠나는 연습을 한다. 아니 유종의 미, 인생의 아름다움을 꽃 피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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