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 안창호(1878-1938)는 세 차례에 걸쳐 미국에 거주하였다. 그 첫 번째는 1902년 10월부터 1907년 1월까지로 유학을 목적으로 도미하였다가 한인친목회와 공립협회를 결성하는 등 초기 이민사회를 지도한 바 있다.
두 번째는 1911년 9월부터 1919년 4월까지로, 1932년 4월 윤봉길 의거 직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강제로 귀국할 때까지 계속된 망명의 시작이었다. 이 때 안창호는 북미실업주식회사를 발기하고 흥사단을 조직하였으며, 대한인 국민회의 중앙 총회장으로 하와이와 멕시코를 방문하는 등 미주 한인사회를 이끌었다.
세 번째는 1924년 12월부터 1926년 3월까지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각료를 사임하고 국민대표회의를 주도한 뒤 대 독립당 운동과 이상촌 운동을 전개하며 그 자금을 모집하기 위하여 도미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안창호가 미주에 머문 기간은 13년에 걸쳤고, 그 가운데에서도 제2차 도미기간은 7년 반에 이르렀다.
안창호는 1911년 9월 미국에 도착하여 대한인 국민회를 해외 한인의 최고기관으로 만들기 위하여 중앙총회를 조직하는 일에 진력하며 동시에 북미실업주식회사와 흥사단의 설립을 위한 노력도 계속하였다.
1914년까지 안창호는 대한인 국민회의 대의원·순행위원, 헌장수정위원 등의 직임을 맡아 일하였으며 1915년에는 4월 중앙총회 제3대 총회장으로 선출되어 1919년 4월 중국으로 떠나기까지 재임하였다. 따라서 7년 반이나 되는 그의 제2차 도미시기는 대한인 국민회와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그는 대한인 국민회를 임시정부형태로 해외 한인 최고기관의 역할을 기대하였으나 1914,5년에 원동지역이 제외되고 하와이 지역이 분규에 빠지면서 오히려 지방총회에도 미치지 못하는 역할을 목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앙총회는 실제 권한과 재정이 결여되어 있었고, 특히 북미 지방총회의 여러 사업으로 그 존재조차 드러나기 어려웠다. 1918년까지 안창호는 중앙 총회장으로 하와이와 멕시코를 1년 넘게 순방하였을 뿐 집행부조차 구성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며 파리 평화회의와 약소 국민 동맹회가 개최되게 되자 중앙총회는 외교문제를 전담하며 북미와 하와이 지방총회의 상위기관으로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외교문제는 중앙총회의 소관사항이었기 때문이었다. 신한민보에 1919년 4월경부터 중앙 총회 광고 난이 신설되는 것만으로도 그러한 위상의 변화가 짐작된다.
그러나 대한인 국민회 중앙총회는 1922년 1월 4일에 해체되었다. 이승만이 파쟁으로 하와이 지방총회를 장악하고 중앙총회와 연락을 끊었던 혼란과 임시대통령으로 권력투쟁을 일으킨 분열이 심하여 재미한인 사회단체의 연립제도가 파괴된 까닭이었다고 한다. 이승만은 그 지지자들로 하여금 1921년 3월 하와이 지방총회를 교민단으로 변경시켰던 것이다. 북미 지방총회만이 대한인 국민회로 존재하게 되면서 중앙총회는 불필요한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중앙총회는 약 10년 간 유지되었으나, 해외 한인의 최고기관으로의 역할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해외 한인들의 분열과 대립으로 폐지되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 이전에 그러한 기능과 역할을 기대한 해외 한인의 염원이 담긴 기관이었던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 안창호가 있었던 것이다.
(최기영/ 세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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