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오래 전에 사업 때문에 급히 돈이 필요한 K에게 돈을 빌려준 적이 있다. 이제 사업이 괜찮아졌다면서, 그동안 참고 기다려준 것을 감사한다면서 돈을 갚겠다고 전화를 한 것이다. 나는 너무 기뻤다. 돈을 받게 되어서라기보다, 신뢰하였던 사람이 약속을 져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K는 어머니를 통하여 알게 되었다. 거의 20년 전에 우리 식구들이 미국 중부 아주 조그마한 시골에 살 때 아이들을 돌보아주시기 위해 한국에서 어머니가 오셨다. 미국사람인 사위와 말이 통하지 않았을 뿐더러 사고방식과 문화가 달라서 고생을 하셨다. 손자들과도 역시 말이 통하지 않았고, 딸인 나도 직장 일과 공부로 바쁘게 살던 때라 어머니를 정성스레 돌보아 드리지 못하였다.
미국에 오신지 일년쯤 되던 어느 날, 어머니는 한국사람이 많이 모여 사는 LA로 가시겠다고 하셨다. 너무 답답하여 떠나신다는 것이다. 한국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곳에서 손자들을 돌보시게 하시는 것이 나는 늘 죄송스러웠기 때문에 한국사람이 많이 사는 LA로 가신다는 것을 말리지 못하였다. 자립정신과 개척정신이 강하신 어머니는 영어 한 마디 하시지 못하시면서 어머니는 LA를 거쳐 샌호제로 오시게 되셨다.
그 때 혼자 외롭게 사시는 어머니를 자기 어머니처럼 도와주신 분이 K이다. 10여년 전에 내가 샌프란시스코로 이사 와서 K를 만나게 되었을 때는 어머니는 이미 포트랜드 동생 집으로 이사가신 후였다. 사업상 형편이 좋지 않았던 그분은 도움을 청할 곳이 없었던지 어머니를 통하여 어려운 사정을 나에게 이야기하였다. 나는 큰아이가 대학 들어가면 쓰려고 그 아이가 어렸을 적부터 조금씩 모아둔 저금통장을 털어 그분에게 주었다.
그분의 사업은 생각과 달리 잘되지 않았다. 그 자매가 미안해하는 모습으로 나를 대할 때마다 나는 나의 어머니를 생각하였다. 그 자매가 너무 미안해 하는 것 같아 나는 그분에게 안부 전화까지 삼가다 보니 서서히 연락마저 끊어지고 말았다.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그분은 늘 빚진 마음으로 살다가 지금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몇년 전에 어머니는 편치 않으신 몸이었는데도 한국 방문을 서두르셨다. 어머니의 친구 분을 통하여 어머니의 고민을 알게 되었고, 한국 방문이 어머니에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게 된 우리 형제들은 의사와 상의한 후 어머니의 한국 방문을 도왔다.
우리들이 어렸을 적에 어머니의 사촌오빠가 어머니에게 자그마한 가게라도 차려서 자식들 가르치는데 도움이 되라고 돈을 빌려주셨다 한다. 장사에 경험이 없으셨던 어머니는 장사에 실패하시고, 돈을 갚지 못하여 항상 죄책감을 느끼시며 사셨다 한다. 어머니는 빚을 갚지 못하여 남한에서는 단한 분의 핏줄인 사촌오빠를 뵐 면목이 없어 피하며 사시다가 미국으로 이민을 오시게 된 것이다. 어머니의 사촌오빠는 돈 잃고 동생도 잃었다고 슬퍼하시다가 이 세상을 떠나셨다 한다.
어머니는 평생 빚진 자의 죄지은 마음으로 사신 것이다. 생전 처음 만난 사촌오빠의 아내에게 빚을 갚고 돌아오시는 길에 어머니는 긴장이 풀리셨던지 뇌출혈을 하셔서 지금 병상에 누워 계신다. 빚진 자의 스트레스를 빚을 져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한다. 그래서인가. 성경 말씀 중에 남에게 돈을 빌려줄 때 받을 것을 계산하지 말고 주라고 하였다. 빚진 자의 마음이 이미 무거운데 빚 독촉으로 짐을 가하지 않는 것이 자비이기에 특별히 지적하여 가르치신 말씀일 것이다.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K의 전화를 받고 감사하였다. 그녀의 사업이 회복된 데 감사하고, 바르게 사는 그녀의 삶이 우리 식구들에게 한국사람들의 위상을 다시 회복하여 주는 것이기에 더욱 더 고마웠다. 서로를 신뢰하면서 더불어 사는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K에게서 연락이 왔다고 어머니에게 알려드리면 어머니는 분명 이렇게 말씀하실 게다. “내가 뭐라 하던. 그 사람은 보증수표야”라고 말씀하시며 환한 미소를 띠실 어머니의 옛 모습이 그리워진다.
김현덕 샌프란시스코 주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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