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리에 상영되었던 한국영화 ‘집으로…’를 뒤늦게 비디오로 보았다. 도시에서 자란 외손자를 얼마동안 맡게 된 늙고 벙어리인 할머니가 손자의 행패와 학대를 참으면서 변함 없는 사랑과 정성을 쏟아 결국 손자가 할머니를 사랑하게 되는 퍽 감동적인 영화였다.
이 영화를 보면서 모든 할머니들의 사랑과 역할을 새삼 되새겨 보는 기회를 가졌는데 특히 미국에서 살고 있는 한인 할머니 할아버지들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미국에 와서 사는 할머니 할아버지는 한국에서의 할머니 할아버지와 다른 역할이 있다. 아들, 며느리, 딸, 사위 등 모두 일해야 생활이 유지되는 맞벌이 부부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우선 이들은 가사를 돌봐야 한다. 또 이곳 노인들은 손자, 손녀들을 기르고 가정교육까지 담당해야 한다. 그 뿐만 아니라 이 아이들에게 한국말을 하게 하고 한국의 얼과 정신도 심어주어야 한다.
이래저래 이 곳 할머니들은 피곤하고 힘들지만 자신들이 해야 할 몫을 더 부여받은 셈이다. 때로는 너무 힘겨운 나머지 자식들에게 원망과 불평을 하는 부모들도 있겠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참 감사할 일이다. 빨리 무용지물이 되지 않고 아주 중요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으니 말이다. 미국에서 할머니의 위치란 참으로 보배로운 존재라 아니할 수 없다.
나는 오랫동안 한국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예의 바르고 우리말을 잘 구사하는 학생들을 보면 대부분 할머니 밑에서 자란 아이들이다.
언젠가 우리 학교에서 주최하는 한국어 글짓기 대회에서는 글제가 ‘할머니’와 ‘추수감사절’이었다. 많은 학생들이 할머니에 대해서 썼는데 그 때 장원으로 뽑힌 작품도 ‘할머니’였다. 그 학생은 할머니가 자기에게 한국말을 잘 가르쳐 주셔서 한국어를 잘 구사하며 글도 잘 쓰게 되었다는 것과 이미 돌아가신 할머니에 대한 감사와 애절한 그리움의 표현으로 심사위원들을 감동시켰다.
나이 60이 넘었고 손자, 손녀 셋을 둔 나는 분명 할머니다. 그것도 미국 속에 사는 한국 할머니임에 틀림없다. 아직은 내가 봉직하고 있는 한국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고 있고 여기저기 공적인 일로 분주한 생활을 보내고 있다. 한국에서 22년, 이 곳에서 18년을 합하면 40년의 교직생활이다. 부족한 줄 알면서도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기에, 한 번 발을 들여놓은 길이기에 천직으로 알고 감사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 하고 있다.
그런데 요즈음 마음속에 일어나는 갈등을 해결하기가 무척 힘들다.
5세 먹은 외손자는 딸애와 함께 살 때 태어나 세 살 때까지 내가 돌봐 주었는데 지금은 분가해서 따로 살고 있다. 손자는 세 살 때까지 우리말을 잘 했는데 요즈음 가끔 만나서 이야기해 보면 한국말을 거의 잊어버렸고 영어로만 이야기한다. 그 밑의 3세짜리 손녀는 더 한심하다. 제 엄마 아빠가 맞벌이 부부이기에 히스패닉 베이비시터가 돌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아이는 세 살이 다 되어 가는데 우리말을 못하고 영어인지 스패니시인지 말도 안 되는 언어로 얘기한다.
그렇다. 이제는 돌아가자. 어서 속히 내 본연의 위치로 돌아가 내 아이, 내 어린 생명들을 돌보면서 ‘미국 속 한인 할머니’의 역할을 톡톡히 감당해야 하지 않을까.
이경희
뉴저지 한국학교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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