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88년부터 1997년 7월까지 북한의 미사일 유도장치를 만드는 군수 공장에서 일하다가 탈북한 후 우여곡절 끝에 한국에 정착하려 했으나 국정원을 비롯한 한국 정부 관계자들의 여러 가지 박해를 피해 미국에 왔다.
미국에 온 후 상원 청문회에서 북한의 미사일 및 대량 살상무기 현황에 대해 증언하고 여러 정치인 및 행정부 관리와 만나 대화하는 동안에도 한국에 두고 온 아내는 내 담당형사, 국정원 부장, 자기 담당형사의 수 없는 전화에 시달린 끝에 응급실 신세까지 지고 말았다. 아내를 이 정도 괴롭히는 마당에 만약 장본인인 내가 한국에 도착하면 도대체 어떤 대접이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내가 북한을 나오기 직전까지 북한의 각종 미사일 생산, 그 중에서도 유도장치와 관련되어서는 거의 100% 일본제 부품을 사용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미사일 기술은 모두 구 소련 기술을 들여다 개량한 것이며 구 소련의 기술고문단 가운데 공산권 붕괴 후 북한에 스카웃 된 약 60여명의 기술자들이 러시아 설계문건 가운데 비밀에 속해 검게 삭제된 부분을 알려 주는 등 기술 제공을 하고 있다. 이렇게 일본, 독일, 러시아 등으로부터 수입된 부품과 기술은 곧 중장거리 미사일로 바뀌어 중동지역으로 팔려 나갔다.
그런 사업의 일환으로 나는 89년도인가 보름간 항해 끝에 이란에 가서 20여분 동안 단 한발의 미사일 발사를 한 후 돌아온 적도 있었고 내 동료들이 1차 걸프전 동안 30여 발의 미사일과 함께 이라크에 파견되었다 돌아오는 것을 목격하기도 하였다. 97년까지만 해도 외화부족 등으로 생산량이 93년 노동 1호 발사 이전수준의 30%에 불과했던 반면 작년 중국을 여행하다 만난 전 직장 친구로부터 들은 바에 따르면 한국정부로부터 많은 달러가 들어와 최근 들어 미사일 생산량이 다시 93년 이전수준을 회복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외화 중 얼마나 많은 부분이 군수공업 종사자들의 실생활개선에 쓰이고 있는지는 미지수이다. 내가 있을 때에도 고급 전자기술자들이 농촌을 다니며 TV를 고쳐주고 식량을 얻어 가족들을 부양하는 생계수단으로 삼는가 하면 군수공장 직장을 이탈하여 행방불명인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무엇보다 요즈음 북한 사람들은 대개 외부 세계에 대한 눈이 뜨이기 시작해 북한 체제 아래에서 살기 싫어 탈북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북한 인민들, 그 가운데서도 지식층이나 지도층 인사들이 가지고 있는 김정일에 재한 충성심은 원래 희박하기도 했었으나 이미 붕괴된 지 오래다. 다만 처벌이 두려워 쉬쉬하며 눈치나 보고 있을 뿐이다. 이런 때에 외부에서 안전한 피신처와 생활보장을 해 준다는 소식이 북한 내에 전달될 수만 있다면 북한 정권은 머지않아 붕괴하고 말거나 적어도 대량살상 무기나 미사일 개발에 치명적 타격을 입을 것이다.
피난처와 생활보장을 한국정부가 제공해야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햇볕정책이라는 착각에 빠져 북한의 붕괴는커녕 저 위험하기 짝이 없는 김정일 정권의 생명을 연장시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남은 유일한 희망은 미국이다. 속히 미국이 독재에 신음하고 있는 북한인민들, 그 가운데서도 지식층이나 지도층들의 미국망명 추진을 공식정책으로 채택하여 김정일 정권의 관에 마지막 못질을 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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