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각자 부모, 독립운동 헌신 5자녀에 조국혼
줄리어드 성악 공부
반평생 미전국 공연
줄리어드 음대를 졸업한 뒤 반평생을 무대 위의 가수로 보낸 플로렌스 안 다케우치(84·한국명 안숙자) 여사는 가장 화려한 삶을 산 초기 이민2세 중 한 명이다. 1940∼70년대 사이에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미 전역의 유명 극장에서 순회공연을 가졌고, 바다 건너 쿠바에서도 인기가수로 명성을 떨쳤다. 유명 코미디언 잭 베니 쇼를 비롯해 TV, 라디오 방송에도 수 없이 출연했다. 브로드웨이 뮤지컬 ‘플라워 드럼 송’의 전국순회 공연에 참여했다.
하지만 그녀의 삶도 편견과 차별에 맞선 끝없는 도전의 연속이었고, 때로는 넘을 수 없는 벽에 눈물을 흘렸다. 다른 초기 이민 2세들과 마찬가지로 안 여사의 삶을 지탱해 준 것은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부모의 ‘훌륭한 사람이 돼 조국에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어라’는 가르침이었다. 부모의 바람대로 안 여사와 네 명의 동생들은 각자의 분야에서 코리안 아메리칸의 명예를 드높였다.
엔지니어였던 장남 안정도씨는 70년대 중동에 진출한 한국기업에 기술을 전수했고, 차녀 안숙성 여사는 뉴욕에서 ‘클라라 안’이라는 건축회사를 운영했다. 삼녀 안숙명 여사는 호놀룰루에서 ‘알라모아’라는 14층 짜리 호텔을 운영하고 있으며, 교육학을 전공한 막내 안숙화 여사는 보스턴의 명문 태프츠 대학(Tafts Univ.)에서 학장을 역임했다. 5남매의 아버지 안원규 선생과 어머니 안정송 여사는 평생을 조국의 독립과 근대화를 위해 헌신한 선구자였다.
1903년 3월3일 안원규 선생과 같은 배를 타고 하와이에 도착한 현 순 목사의 소개로 만난 두 사람은 1919년 호놀룰루에서 결혼했다.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은 부친은 1909년 국민회 조직과 1914년 대조선국민군단 창설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안 여사는 “아버지는 선교사였던 캐터린 쿡 가족에게 땅을 빌려 카후쿠 인근에 한인군대 캠프를 마련했다”고 회상했다.
이화여전을 졸업한 모친 안정송 여사는 1930년대 국어학교를 운영했고, 1950∼60년대에는 여성권익에 앞장섰던 친구 김활란 전 이화여대 총장과 이태원 여사 등에게 꾸준히 돈을 보냈다. 미주한인 사업가 1호로 알려진 부친 안원규 선생은 양복점, 담배무역, 간장제조 등을 통해 큰 돈을 모아 1920년대에 승용차를 굴리기도 했다. 이들은 부를 한인사회와 조국에 환원했고 1937년 고교 졸업 뒤 본토로 유학을 떠난 안 여사는 노래를 부르며 학비를 마련해야 했다.
LACC를 거쳐 1939년 줄리아드 성악과에 입학한 그녀는 1943년 유학생 이근성씨와 결혼했으나 얼마 못 가 파혼했다. 두 아들과 함께 남겨진 안 여사는 먹고살기 위해 무대에 다시 섰다. 뛰어난 실력과 미모로 청중을 사로잡은 그녀는 1970년대까지 가수로 활동했다. 안 여사는 1954년 공연 중에 만난 일본계 미국인 다케우치씨와 재혼한 뒤에는 남가주에 정착해 라스베가스와 LA에서 가끔씩 공연을 가졌다.
LA 인근 캐년 컨트리에서 딸과 함께 노년을 보내고 있는 안 여사는 수줍어하면서도 미 연예계에 한인을 알린 자신의 삶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내비쳤다.
<이의헌 기자> argos@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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