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세계는…
“베트남 미군 철군 미신문들 톱 장식”
미주 한국일보가 탄생한 1969년 6월9일은 구름이 약간 낀 월요일이었다.
당시 1부당 10센트에 판매되던 LA타임스에 따르면 그날의 주요 뉴스는 단연 베트남전이었다.
베트남전이 극점을 향해 치닫던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듯 69년 6월9일자 LA타임스의 1면은 전쟁관련 소식으로 가득차 있었다.
1면 머릿기사는 8월 이전에 미군 2만5,000명을 베트남에서 철수시키겠다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발표였고 그 옆으로 구엔 반 티우 월남 대통령과 함께 미드웨이 아일랜드를 방문한 닉슨 대통령의 4단짜리 사진이 큼지막하게 자리잡았다.
그 해 취임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캄보디아 폭격을 감행, 한편으로는 베트남전을 확전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월남군의 역할을 확대하는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미군의 철군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려 시도했다. 베트남전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었던 셈이다.
LA 타임스는 또 학생들의 폭력적 시위에 대해 대학당국이 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지적한 국립폭력원인예방위원회의 보고서를 크게 다뤄 68년부터 미국을 휩쓴 학생운동과 반전시위의 열기를 전했다.
반전 무드는 한해전에 발생한 미군의 미라이 양민 학살사건이 뒤늦게 보도되면서 대폭발을 일으켰다. 워싱턴에서는 연일 대규모 시위가 열렸고, 시간이 지날수록 시위 성격도 격렬해지고 있었다.
한편 6월9일자 LA타임스를 구입한 독자들은 금세기 최고의 미남배우로 꼽히는 로버트 테일러가 전날 57세로 타계했다는 뉴스를 읽고 ‘인생무상’을 실감했을지도 모른다. 신문이 전한 그의 사인은 폐암이었다.
세계도 요동치고 있었다. 이스라엘이 소소한 외교적 승리를 챙기고는 있지만 아랍 국가들과의 평화를 거두지 못한다고 내용의 기사는 예나 지금이나 조용할 날이 없는 중동의 모습을 보여준다.
베트남전은 기성사회의 가치관을 타파하려는 반문화 운동에 크게 기여, 8월 뉴욕주 베델에서 열린 우드스톡은 69년에 히피 문화가 절정에 달했음을 전했다. 당초 1만∼2만명이 모일 것으로 예상됐던 우드스톡 축제에 40만명 이상의 인파가 몰려 4일간 술, 마약과 섹스가 난무했다.
이에 앞서 6월27일 뉴욕시 경찰이 게이 바를 급습 단속했을 때 동성애 고객들이 맞서 싸워 3일간 폭동이 일어나면서 동성애 운동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같은 히피 무드에 힘입어 69년에 ‘미드나잇 카우보이’(Midnight Cowboy)가 X 등급 영화로는 유일하게 아카데미상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69년 중 가장 역사적인 순간을 꼽는다면 우주선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한 7월20일일 것이다. 닐 암스트롱이 “한 인간에게는 작은 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큰 도약”이라는 ‘명언’을 날리며 우주 시대의 장을 여는 순간이었다.
한편 보잉 747이 처녀비행을 성공적으로 마쳐 점보 제트기 시대가 도래했다. 한편 콩코드기의 기본형도 같은 해 처녀비행을 가졌다.
69년은 미국, 소련 등 세계 100개국이 핵확산방지조약(NPT)을 체결한 해이자 어린이용 교육 프로그램 ‘새서미 스트릿’이 처음으로 방영된 연도이기도 하다.
이민문호 ‘활짝’… 가족초청 급증
69년 당시 LA한인인구 11,000명
한국일보 미주판이 LA에 첫 선을 보인 1969년은 한인이민사의 과도기라고 할 수 있다. 69년은 바로 한 해전 이른바 ‘케네디 이민법’이 시행에 들어가면서 이민 문호가 활짝 열린 해이기도 하다.
이전까지 한인 이민은 간호원, 의사, 약사, 영양사 등 전문직 이민이 주류를 이뤘으나 이민법 개정에 따라 한인 이민의 성격도 69년을 기점삼아 일대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66년부터 68년까지 전문직 케이스가 73%, 초청 케이스가 한인 이민의 26%를 차지했으나 69년에서 72년까지는 전문직 케이스의 비율이 25%로 급감했다.
1970년도 인구센서스에 잡힌 LA지역 한인 숫자는 8,811명이 고작이었으나 노준희 USC교수는 69년 당시 LA 한인인구를 약 1만1,000명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한국발 이민 물결이 파고를 높이면서 1969년 이후 한인 인구는 해마다 거의 갑절로 불어났다.
65년에서 68년까지 연 4,000명선에 불과하던 것이 1969년 들어서 급증하기 시작, 71년에는 1만4,297명의 한인이 미국에 입국했다.
그렇다면 70년대의 급팽창을 앞둔 한인타운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본격적인 가족이민이 시작되기 직전 한인사회는 아직 동면상태에 머물러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한인타운의 중심은 올림픽가가 아니라 훨씬 남쪽인 제퍼슨 블러버드였다. 한국일보가 72년 미주 한인언론사상 처음으로 출간한 제1호 한인 전화부에 따르면, 당시 업소라고는 식당이 15개에 불과했고 식품점은 10개, 여행사 8개, 자동차딜러 4명, 부동산 소개업자 2명, 일반의사 2명, 치과의사 4명, 보석상 1개, 가구점 1개, 자동차정비소 1개, 회계사 4명, 꽃집 3개, 한의원 1개, 인쇄소 3개, 미장원 2개, 생명보험대리인 6명, 나이트클럽 1곳이 있었다. 물론 69년에는 식품점과 식당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LA지역 초중고등학교에 재학하는 한인 학생들도 2,000명선에 불과했다. 교회는 71년의 경우 28개였고 신자는 약 3,000명에 그쳤다. 한마디로 거리에서 한인을 보는 것이 무척 반가운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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