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미 독립 기념일 날이 가까운 모양이다. 10여 년 전 가든그로브시로 이사 온지 2개월만에 맞은 독립기념일 날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한 참 이사를 하고 집 정리하느라 정신 없이 지내는데 옆집 할아버지가 찾아왔다. 이사 온 것을 환영한다며 자기소개를 하고 기념일 날 자기 집 앞에서 바비큐나 해먹으면서 즐기자고 했다.
남편과 함께 오후5시쯤 불고기를 좀 가지고 갔더니 꽤 많은 이웃들이 모여 핫 독도 굽고 아이스크림도 만들어먹으면서 재미있는 이야기하고 있었다. 우리 동네는 여러 민족이 어울려 살고 있다. 네덜란드, 헝거리, 이탈리아, 일본, 월남, 유태인, 히스패닉, 한국인 우리까지 1세, 1.5세, 2세, 4세들이 제각기 살아온 날들과 아이 키우며 있었던 이야기를 했다.
네덜란드 할머니는 이 집에서만 50년을 산 토박이다. 그분의 아이스크림 기계는 한국에서 사먹던 재래식으로 만든 것이었다. 둥근 통에 얼음과 가장자리에 굵은 소금을 넣고 그 안 작은 통속에 아이스크림 원료를 넣어 들리면 바깥의 얼음으로 아이스크림이 되는 이 골동품 기계를 가지고 나와 모두 그 통을 돌리면서 아이스크림을 만든다. 그런데 그 날은 어쩌다 소금이 안에 들어갔는지 짭짤한 아이스크림이 되었다. 그래도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맛있게 먹었다.
각각 자기 가정소개도 하고 태생에 대한 배경도 이야기하는 중 헝거리 분은 공산주의와 싸우느라 부다페스트 시청 앞 광장에서 많은 무리들이 피 흘리던 이야기를 했다. 나도 그때 장면을 TV에서 보았던 기억이 생생했다. 정치적으로 너무 살기가 어려워 미국으로 망명을 오게 되었다고 했다. 그분은 여기 온지 35년, 이 집에서 산지도 30년이 되었다고 했다.
월남사람은 배타고 기약 없이 태평양에서 헤매던 급박했던 날의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절박했던 시절도 있었는데 이렇게 자유의 나라에 와서 아쉬움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것에 모두 감사했다. 나나 이분들같이 1세들은 언어가 자유롭지 못해 더러는 알아들을 수 없어도 동시대를 살며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있어 의사소통이 되었다.
미국에서 오랜 동안 살아 왔지만 동부를 떠나온 이후 타인종과의 접촉이 거의 없었다. 이런 곳에서 동래 외국인들과 정을 나눌 수 있는 이 시간이 너무도 귀하게 느껴졌다.
이야기하는 동안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고 서로 마음을 열어 친구로 받아들였다. 집집마다에 휘날리는 성조기는 독립의 기쁨을 한껏 더해주었다. 이민의 나라답게 각각 다른 민족이 모여 이 나라를 더 강하게 만들고 있다.
아이들은 뛰어 놀고 우리는 이야기도 하고 먹기도 하다보니 해가 어느덧 뉘엿뉘엿 땅 밑으로 사라져 갔다. 아이들이 기다리던 불꽃놀이가 시작되어 여러 모양의 색색으로 만들어진 불꽃을 보면서 함께 환성을 질렀다. 불꽃 타는 냄새와 함께 불꽃 터지는 소리 또한 요란했다.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가 한꺼번에 불꽃에 싸여 타버리는 듯 상쾌했다.
1년에 한번이지만 다 민족이 어울려 사는 이곳에서 동네 사람들과 갖는 독립 기념일의 의미는 크다. 작년 기념일에 모여 찍었던 사진을 모아놓고 올해 또 우리가 모일 때 나누어주려고 기다리고 있다.
네덜란드 할머니가 연로하여 기동이 편치 않은데 올해 나올 수 있기를 기대한다.
정선희/가든그로브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