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시절 안톤 슈낙의 명수필,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읽으며 그 유려하고 다감한 문체에 온통 넋을 빼앗겼던 기억이 있다.
모든 게 넘치게 풍족한 삶을 구가하며 그 아득했던 옛날 헐벗고 굶주렸던 그 시절을 되돌아보면 그 지지리 못살았던 그 때에 향한 아련한 향수가 가슴속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까닭은 왜일까.
대북 송금 사건 두 번째 재판이 열리던 날 박지원 전 비서실장이 “현대 측이 1억 달러를 대신 지급해달라고 요청한 사실이 있느냐”는 변호인의 질문에 “기억이 없다”며 혐의를 부인했다는 보도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기억이 없다’니. 딱 부러지게 ‘예스’ 아니면 ‘노’지 어찌 그리 비겁하게 교묘히 빠져나갈 틈 엿보며 두리 뭉실 뭉그적거린단 말인가.
오늘날 고국에서 벌어지는 그 흔한 분별 없는 반미구호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촛불시위라니. 촛불은 자기를 태워 세상을 밝히는 자기희생 자기를 초월한 체념의 묵시적 상징 아니던가. 인간의 고귀한 죽음을 놓고 흥정하고 음모하고 뒷전에서 자신들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부추기고 밀어붙이는 집단 최면의 간교함을 목격하며 슬픔과 좌절을 가눌 길 없다.
나는 1·4 후퇴 당시 여덟 살 철부지 나이에 고향과 어머니를 한꺼번에 상실한 겹 실향민이다. 그 천애 고아 같은 내가 살아남아 오늘이 있게 된 것은 미국이란 나라와 그 국민의 도움이 컸다. 그러나 나는 그 얽힌 끈적한 인연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다. 지나친 사대, 지나친 피해의식, 우월감 모두 해악이다. 당당하게 그러나 국제관계는 이성에 의거, 예의바르고 슬기로운 대처가 긴요하다.
‘한국 사람이 무서워요.’커다란 눈망울 껌벅이며 겁먹은 표정으로 울먹이는 서남아시아 어느 나라에선가 왔다는 깡마른 체구의 까무잡잡한 외국인 노동자의 모습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언제부터 우리가 그리 잘 살게 됐다고 우리들이 마다하는 3 D업종에 매달려 한 푼이라도 손에 쥐어보겠다고 바둥거리다 손가락이 팔이 프레스에 잘려나가도 제대로 치료도 보상도 받지 못하는 인권사각지대의 그들보다 그들을 등쳐먹고 서슴없이 폭력을 행사하는 악덕 업주와 그 하수인들, 그리고 그 사실을 눈감은 채 방치하는 대한민국이라는 내 조국 앞에서 우리는 더 크낙한 슬픔과 좌절을 삼키게 된다.
대한민국은 딱히 외국인들에게만 잔인한 게 아니다. 그들은 재미 가수 유승준에게도 그랬으니까. 국민감정을 이해 못할 바 아니다. 그런데 병무청과 외무부는 국민정서를 법조문보다 위에 올려놓았다. 유승준이 실정법을 어긴 일이 없다면 국민정서와 법 집행 사이에 명확한 선을 긋는 게 성숙한 의식수준일 게다.
1994년 서울에 들렀다 ‘부실공사 추방 원년’이란 간판을 보았다. 그렇다면 정부는 이제까지 부실공사를 눈감았거나 공범이었음을 무언으로 고백한다는 이야기 아닌가. 아이러니컬하게도 ‘부실공사 추방 원년’에 서울 한복판에서 성수대교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그 이듬해에 연이어 터진 삼풍백화점 사건으로 재외 한인들은 한참동안 직장의 외국인 동료들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어 더 서글펐다.
한 핏줄 나눈 북의 동족과 아웅산 수치 여사의 인권문제로 유엔에서 온 지구촌이 들고 일어날 때도 뒷전에 물러 앉아 딴전만 피우던 우리의 모습이 가슴을 후빈다. 그러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어디 이뿐이겠는가. 이쯤 해두자
배 시 언
뉴저지 섬기는 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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