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운/리버사이드 도산기념 사업회 총무

한국은 요즘 연일 ‘검은 돈’으로 시끄럽다. 한국에서 부끄러운 비자금 사건이나 부정부패 사건이 터질 때면 항상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다.
1980년대 초쯤 한국 기업의 스위스 취리히 지점에 주재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본사요원 3명과 스위스인 현지 직원 등 20여명이 가족과 같은 분위기에서 일한 그 때를 지금까지 잊을 수가 없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스위스의 경치 때문만은 아니다. 항상 깨끗하고 잘 정돈된 거리와 마을도 인상적이었지만 그것 때문만도 아니다. 내게는 스위스를 영원히 잊지 못하게 하는 산뜻한 경험이 하나 있다. ‘3프랑38라펠’에 얽힌 사연이 그것이다. 스위스 화폐단위 프랑은 미국의 달러에, 라펜은 센트에 해당한다. 돈의 가치로 보면 2달러70센트쯤, 한국 돈으로는 4,000원도 안 되는 커피 한잔 값이었다.

부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은행에서 보내온 월말 보고서의 입출금 현황을 검토하는데 서류 아래쪽의 한 줄에 눈이 멈췄다. 입금란에 3.38이라는 숫자가 찍혀 있었다. 당시의 업무 성격상 입금액은 아무리 적어도 1,000단위 이상인데, 3.38은 아무래도 잘못된 것임이 분명하다고 생각되었다. 정확하고 빈틈 없기로 정평이 나있는 스위스은행이 이런 실수를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본사파견 경리담당 직원을 불러 확인해 보아도 내용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은행을 통해 알아보니 스위스 현지인 직원 중 한 사람이 입금시킨 것이었다.

그 직원을 불러 어떻게 된 것인지 물었다. 그는 자신이 크게 불신이라도 당한 듯, 잔뜩 불쾌한 표정으로, 보관중인 입금증과 발송된 텔렉스 용지를 가져 왔다. 그러면서 금액 산출에 틀림이 없다고 항변하는 것이었다. 텔렉스 수신처는 스페인 라스팔마스, 글자당 전송단가는 얼마, 타전한 글자 수는 몇자, 그러니까 3프랑38라펜이 정확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내용인즉 그는 가족 휴가용 호텔을 예약하기 위해 회사 텔렉스를 이용했고, 개인용도로 사용한 텔렉스 비용을 정확하게 계산해 회사에 입금시켰던 것이다.

나는 그의 설명을 듣고 말을 잃었다. 그 후에도 비슷한 이유로 회사 계정에 입금된 적은 금액의 숫자는 종종 눈에 띄었다. 현지인 직원들은 회사 복사용지를 개인용도로 사용할 경우에도 용지 매수의 용지당 단가를 곱한 액수를 은행에 입금하였다. 스위스 현지인들로서는 하나도 이상하거나 감동스러울 것 없는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이 사건(?) 이후 나는 회사 차량을 이용해 가족여행이라도 떠나게 될 경우라든가 스위스 기준에 맞지 않는 애매한 접대경비를 집행해야 할 때마다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한국의 기업정서나 전통적인 접대 문화, 공과 사를 구분하지 않는 관행들이 송두리째 부끄럽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그 일이 있은 지 벌써 20여년이 흘렀다. 그 뒤 미국 땅에 살면서 특히 소득신고를 해야 할 철이 되면, 그 때의 사건이 불현듯 떠오르곤 한다. 그러면서 성실히 그리고 정직하게 일하던 스위스인 직원들 얼굴 하나 하나가 생생하게 스쳐지나간다.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들이 사는 스위스를 나는 늘 그리워하고 잊지 못한다. 나의 조국은 언제나 그렇게 자랑스러운 조국이 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