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네가 좀 가줘라.
난, 그런 곳에 취미 없잖아.
그렇다고 여자를 바람맞힐 수는 없는 일 아니니?
몰라, 가다 마음 변할지.
이렇게 떠맡은 미팅 티켓을 가지고 용진은 졸업 봄 축제에 참석을 했다. 용진은 전혀 미팅에 대한 호기심이 없었다. 다른 학생들은 미팅에서 이성 친구를 만나고 또 결혼 상대도 찾고 하는데 용진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신체의 결함이나 정신적인 어떤 문제도 없었다.
키는 180센티미터에서 1센티미터가 모자랐다. 체격은 운동으로 단련되었고 얼굴은 귀공자처럼 생겼다. 다섯 살 때 미국 들어와 학교성적은 상위권에 들었다. 대학에서도 기계공학을 전공해 벌써 취직까지 되었다. 요즘말로 썩 잘 나가는 젊은이다. 더군다나 용진은 삼대 독자로 빨리 결혼을 해 대를 이어가야 하는데 저렇게 태평스럽게 지나고 있다. 용진은 티켓을 가지고 짝을 맞추었다.
전, 대리로 왔으니 그냥 제이 라고 불러줘요.
대리라뇨?
친구가 급한 일로 못나와 제가 대신 나왔죠.
저도 친구의 부탁을 받고 나왔는데요.
서로가 대리 역이라 의외로 즐거웠다. 용진은 상호 노릇을 어떻게 하느냐보다 용진이 노릇도 안 해도 된다는 커다란 즐거움이 있었다. 신기한 자유. 자유란 것이 이렇게 상대와 이야기하는데도 아무런 부담이 없고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용진은 그녀와 지껄이고 큰 소리로 웃으며 뜨겁고 진한 색깔 이야기도 마구 했다. 용진은 처음으로 여자와의 대화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나를 의식하지 않고 인간 본래의 모습대로 대화하는 자유. 우린 이런 대화 속에서 있는 그대로를 보여 주면서 왜 생활하지 못하고 허식과 과시만을 보여주려고 할까. 용진은 편안하고 즐거운 시간 속에서 그녀와 아쉽게 헤어졌다. 서로 대리란 역할 때문에 그 이상 더 알려고 하지 않았다.
용진은 전화기를 들었다 놓았다 했을 뿐 번호는 누르지 않았다. 창밖엔 겨울 장마비가 뿌리다 말았다 햇빛도 비치기도 한다.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끝날 것.
용진는 재킷을 걸치고 방문을 나선다. 리빙룸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어머니가 용진을 빤히 쳐다본다.
왜, 안 간다고 했잖아?
그래도 나가 봐야죠.
못나긴, 여자는 가끔 바람도 좀 맞히고 해야지.
처음 만나는 여자를 어떻게 그렇게 해요.
그래, 넌 요즘 주말마다 여자를 만나는 것 같더라.
용진 어머니는 매일 여자를 만나더라도 빨리 결혼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손이 귀한 집안이라 더욱 마음이 초조했다. 한국 딸네 집에 있는 시아버지는 일주일이 멀다하고 용진이 결혼 문제를 물어온다. 용진 어머니는 외동아들의 결혼을 부쩍 서두르고 있다. 교인들, 동창생들, 친구의 친구들한테까지 부탁해 신부감을 보고 있다. 그렇게 맞선을 여러 번 보았지만 용진은 아직 상대방을 두 번 이상 만나지 않고 있다. 맞선을 본 아가씨들의 이력서는 화려했다. 취미도 다 고상했다. 꼭 화투짝을 맞추듯이 조건에 걸맞은 신부감만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용진은 그러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요즘 여자의 외모는 얼마든지 아름답게 꾸미고 치장할 수 있다. 용진이 찾고 있는 신부감은 그런 미모와 화려한 경력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내면으로 흐르고 있는 맑고 따뜻한 인간의 냄새가 나는 신부감을 찾고 있는 것이다. 요즘 젊은 여자들한테서 그런 내면의 멋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꾸면 현실에서 뒤떨어져 좋은 직장이나 신랑감을 구하지 못하는 줄 알고들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한 집안의 손이 끝나는 것이 아닐까?
용진은 연애 경험도 없다. 그렇다고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남자와 여자와의 아름답고 진실한 만남에는 서로의 영혼 깊숙한 곳에서 불을 붙이고 끌어당기는 어떤 신비한 힘이 작용해야 하는 것’ 이라고 막연하나마 확실하게 믿고 있다. 비는 게으른 사람 낮잠자기 좋을 듯이 왔다 말았다 하고 있다. 용진은 상호가 얼마 전부터 한번 만나 보라고 한 여자를 만나기 위해 나왔다. 무조건 만나보라는 말만 듣고 나왔다. 이름도 얼굴도 몰라 용진은 아침부터 망설이고 있었던 것이다. 용진은 샤핑몰 파킹 장에서 내려 주위를 살펴보았다. 파란색의 포드 차는 보이지 않았다. 약속 시간보다 십 분이 지나고 있다. 저쪽 입구 쪽에서 파란색 차가 한 대 미끄러져 온다. 용진은 차 문을 닫고 굴러오는 차를 바라본다. 푸른색 차가 용진이 차 앞 라인에 섰다. 미색 가디건를 걸친 밝고 싱싱해 보이는 여자가 내렸다.
용진씨? 성희예요.
성희는 용진이 앞으로 손을 내민다.
반갑습니다.
망설이다 좀 늦었어요.
망설이다뇨? 왜요?
이런 날 사람을 만나면 가슴이 설레다가도, 처음 만나는 사람은 좀 따분한 마음이 들잖아요.
성희는 용진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거침없이 말을 한다.
뭐, 따분하다고요?
신경 돌려놓으세요. 이렇게 나왔잖아요.
멋 대로군요.
제 생각을 솔직히 말했을 뿐이에요. 어디로 가시겠어요? 이런 날 해안선을 따라 드라이브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성희는 용진의 차 옆으로 가 섰다.
각자 차로 가게요? 그래도 남자가 운전을 해야죠.
용진은 한방 얻어맞은 것처럼 얼떨떨함 속에서 퍼뜩 이상한 생각이 떠올랐다. ‘만일 내가 저 여자를 좋다고 해도 저 여자가 나를 싫다고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여자와 맞선을 보면서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것이다. 여자에 대한 파격적이 생각이었다. 차는 산을 넘어가 태평양의 푸른 물결이 너울거리는 해안 도로를 달린다.
참, 성희씨 고향이 어디세요?
왜요? 마산 지나 진동이란 조그만 마을인데요.
전, 서울입니다. 신혼 여행은 진동으로 가죠 뭐.
뭐라고요? 누구 신혼 여행 말예요?
누구는 누구입니까. 우리죠. 이제 대리 배역이 아니고 진짜 배역으로 살아갑시다.
어머머, 엿장수 마음 대로요. 용진씨 참 엉큼하네요.
성희의 얼굴이 붉어지면서 눈을 동그랗게 뜬다. 용진의 앞으로 소박하고 야무진 성희가 선명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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