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의 진화설에서 중요한 부분은 생명체의 생존경쟁이다. 살아남으려는 경쟁을 통한 진화를 말한다. 100여년 전 러시아 혁명가 표트르 크로폿킨이 이에 반기를 들고 공생의 기치를 내걸었다.
그는 저서 ‘상호부조론, 진화의 요인’(Mutual Aid, A Factor of Evolution)에서 인류는 서로 도와야 공생하고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가족을 상호부조의 사회 결합체로 본 영국의 철학자 데이빗 흄도 더불어 사는 삶의 가치를 높이 샀다.
한민족에게 상호부조의 대표적인 것은 ‘계’다. 그 본류는 삼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제대로 ‘계’란 이름으로 등장한 것이 고려 의종 때 사교적인 모임인 ‘교계’다. 무신의 난이 발생한 뒤 문인과 무인이 화목하게 지내자는 취지의 ‘문무계’가 있다.
’계’는 성격이 다양하다. 동갑내기들이 우정을 돈독히 한 ‘동갑계,’ 나이가 같은 노인들이 노후의 외로움을 달랜 ‘노인계,’ 성씨가 같은 사람들로 구성된 ‘화수계’가 있다. 또 가문을 중시하다 보니 ‘종중계’ ‘종약계’ ‘문중계’가 생겼고 혼례나 장례를 치를 때 목돈이 들면 ‘혼상계’가 도와준다.
농사를 지을 때 마을 전체가 협력하자는 취지의 ‘계’도 있다.
농기구를 함께 구입해 사용하는 ‘농구계,’ 소를 공동으로 사용하는 ‘우계,’ 땅을 함께 경작해 수확을 나누는 ‘농계,’ 홍수를 방지하고 논에 물을 잘 대기 위해 물길을 내는 데 협력하는 ‘제언계,’ 마을 주민들이 뭉쳐 이웃을 보호하자는 ‘동계’와 ‘이갑계’가 있다.
’계’는 한민족의 전통을 말살하려는 일제에 의해 금지됐다가 해방 이후 다시 활기를 찾았다. 친목을 위한 각종 계가 있고 목돈 마련을 목적으로 한 ‘번호계’와 ‘낙찰계’가 근대적 ‘계’의 대표적인 형태다.
한인사회에서도 ‘계’는 엄연히 자리하고 있다. ‘먹자계’ ‘술계’처럼 적은 돈을 매달 부어 우의를 다지는 데 치중한다면 별 문제 없다. 그러나 규모가 커지면 상황이 달라진다. 연전에 한인부부가 25개의 낙찰계를 조직해 10개를 먼저 탄 후 다음 계원 차례가 왔을 때 30여만달러를 챙겨 도주한 일이 있었다. 또 다른 계주는 계원 30여명에게 총 150만달러의 피해를 입혔다. 며칠 전 수십만달러 규모의 ‘계’를 운영하던 여성이 종적을 감춰 피해자가 속출하고 있다.
계주 입장에서는 손쉽게 큰돈을 끌어 모을 수 있지만 깨지면 속수무책인 게 바로 ‘계’다. 또 고의가 아니더라도 특정 계원이 돈을 붓지 못하면 뒤틀린다. ‘계’가 무용지물이란 뜻은 아니다. 하지만 잘못되면 돈도 잃고 우정도 잃는다.
이제는 그저 아름다운 우리의 미풍양속 정도로 간직할 때가 된 것 같다. 뜻은 다르지만 저무는 계미년과 함께 ‘계’도 그 기운을 다했으면 한다.
<박봉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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