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평양=정지원 기자> 뉴저지 오렌지한인천주교회 박창득(70, 본명 어거스틴) 신부가 평양 장충성당에 상주하는 신부직을 추진하고 있다.
박 신부의 장충성당 사제관 입주가 성사되면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북한에 상주하는 성직자가 된다.
기본적으로 종교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보여온 북한이 미국 시민권자인 박 신부에게 상주 신부 자격을 고려하고 있다는 사실은 상당히 이례적이면서 고무적인 현상이다.
5월28일 중국 베이징을 통해 방북한 박 신부는 29일 장충성당에서 100여명의 평양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미사를 집전한 뒤 사제관을 둘러봤다.
박 신부는 현재 추진되고 있는 사제관 입주가 현실화되면 장충성당에서 미사를 정기적으로 집전하고 인도적인 차원의 북한 구호 활동을 계속 전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북한이 박 신부의 상주 신분을 고려하고 있는 이유는 그가 지난 10여년간 국수공장 설립과 황해도 농장 지원 등 대북 구호 활동을 꾸준하게 전개해온 사실이 크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박 신부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겠지만 북한 주민들의 마음에 평화를 심어준다는 사명감으로 임하겠다며 이번 일이 앞으로 젊고 활기 있는 성직자들에게 북한에 사랑과 평화를 전할 수 있는 길을 터주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 신부의 평양 상주를 추진하고 있는 북한측 한 관계자는 지난 수년간 박 신부가 아무런 사심 없는 성직자의 모습을 보여온 사실이 그의 사제관 상주 입주를 고려하는데 긍정적으로 반영되고 있다고 밝혔다.
박 신부의 평양 상주는 아직까지 북한 정부의 완전한 승인을 남겨두고 있으나 현재 추진되고 있는 상황에 비춰볼 때 실현 가능성은 상당히 높은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평양의 선교구역인 장충동에 위치한 장충성당은 지난 1988년 건립됐으며 사제나 수녀 없이 신도 대표 2명이 100여명의 신자들을 대상으로 매주 일요일 미사를 집전해 왔다.박 신부는 지난 96년 남북 분단 이후 최초로 장충성당에서 부활절 미사와 더불어 최근에는 전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추모 미사를 집전하는 등 그동안 북한을 방문할 때마다 이곳에서
수차례 미사를 집전한 바 있다.
지난 1961년 대전 교구에서 사제서품을 받은 박 신부는 70년대 중반 뉴저지 오렌지 한인천주교회 주임신부로 임명됐으며 현재 뉴저지 뉴왁 대교구 한인시목 대표(몬시뇰)로 소속돼 있다.
■박창득 신부 인터뷰
돌아가신 교황님이 이번 일을 많이 도와주신 것으로 믿습니다.
북한 역사상 첫 외국인 상주 성직자 자격을 추진중인 박창득(사진) 신부는 평양에서 가진 본보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전세계 언론이 교황님의 서거 소식을 비중 있게 다룬 점이 북한측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 같다고 밝히고 따라서 본인의 장충성당 사제관 입주가 심각하게 논의되
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박 신부는 그동안 원조 목적으로 북한을 약 25차례 방문하면서 사제관 대신 호텔에 머물렀던 점이 항상 마음에 걸렸는데 만약 사제관 입주가 허용되면 무엇보다 그 문제가 해결돼 기쁠 것이라고 말했다.박 신부가 북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78년이다.
당시 성령 세미나에서 사도행전에 나오는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돼라’는 주님의 말씀이 마음에 그렇게 와 닿을 수가 없었습니다. 본인의 ‘땅끝’은 당시만 하더라도 우리가 결코 갈 수 없었던 북한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언젠가는 북한 주민들을 위해 복음을 전파하는 성직자
가 되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 드렸습니다.90년대 중반 들어 북한 지원 사업이 조금씩 개방되면서 박 신부는 96년 평양에 국수 공장을 설
립했다.
성직자가 인도적인 차원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는 주민들에게 식량을 제공하는 일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국수공장의 지속적인 가동을 위한 추가 원조가 필요로 되면서 그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과 말들이 여기저기서 나오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그가 주임신부로 있었던 한인천주교회에서도 ‘친북 인사’ 또는 더 심한 표현까지 써가며 그를 비난했다.
그런 얘기가 귀에 들릴 때마다 마음은 아팠지만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하느님이라는 든든한 스폰서가 계시다고 생각하고 그 분의 사랑을 더욱 열심히 전하려 노력했습니다.
박 신부는 북한에 상주하는 신부가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앞으로 더욱 훌륭한 성직자가 이 땅에서 복음과 사랑을 전파할 수 있도록 길을 터 주는 것이 본인의 진정한 바램이라고 전했다.그는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면 한도 끝도 없다며 참된 신앙인으로서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북한 평양= 정지원 기자>
■ 북한 유일의 성당 ‘장충성당’
지난 1988년 건립된 장충성당은 평양의 선교구역인 장충동에 위치해 있다.
신자들은 약 130명에 달하며 사제나 수녀 없이 신도 대표 2명이 매주 일요일 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미사 내용은 그 어느 가톨릭 성당의 미사와 다를 바가 없으며 여성 8명으로 구성된 성가대도 두고 있다.그러나 미사를 마친 뒤 교우들이 함께 하는 친교 시간은 특별한 날을 제외하고는 없다.성당내에는 십자가와 성모 마리아상을 비롯, 일반 성당과 전혀 다를 바가 없으며 신자 모두가 찬송가집을 갖고 있다.성당 바로 옆에는 현재 비어있는 사제관이 자리잡고 있다.
■ 지금 북한은...
벤츠등 외제차량외 현대 소나타도 눈에 띄어
대동강변 따라 데이트하는 연인들 ‘인상적’
<평양= 정지원 기자> 초여름의 날씨가 완연한 북한 평양의 거리는 포플러 나무에서 날리는 씨앗이 마치 눈발을 연상케 했다.
북한 고려항공을 이용, 중국 베이징을 출발해 평양 공항에 내려 자동차를 타고 약 25분 달리자 개선문과 함께 평양의 중심지가 눈에 들어왔다.
곳곳에 들어서 있는 단순한 회색빛 고층 아파트와 석조 건물들이 도시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약간은 어둡게 만들었지만 평양의 거리를 자유스럽게 걸어 다니는 주민들의 표정은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비교적 밝아 보였다. 남성들은 대부분 검정색이나 회색, 또는 옅은 갈색의 노동복 차림을 하고 있었으나 여성들은 곱게 화장을 하고 정장 차림을 한 모습이 눈에 많이 띄었다.모내기 철을 맞아 논밭으로 향하는 주민들도 상당히 많았으며 거리 곳곳에서는 남성들이 보도 블록을 새로 깔고 있었다.
도로는 한산했으나 벤츠를 비롯, 독일과 일제 차량이 눈에 띄었고 현대 소나타 차량도 볼 수 있었다. 일부 교차로에 신호등이 있었으나 작동은 하지 않았고 대신 파란색 복장을 한 여성 교통 안내원이 교차로 중심에 서서 교통정리를 하고 있었다.곳곳에는 대형 동상이나 고전풍으로 아름답게 지어진 조형물과 더불어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 위원장을 찬양하는 붉은색 선전문구들도 눈에 띄었다.
거리에는 식당을 비롯, 백화점, 식료품 상점, 텔레비전 수리, 과일 상점이라고 표시된 상점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전력난 탓인지 가로등은 많이 켜지지 않아 평양의 밤거리를 어둡게 했다.평양의 백화점은 비록 단순하고 한산했으나 일제 평면 텔레비전을 비롯한 각종 가전제품과 모든 생필품을 구비하고 있었다.
아직까지 북한을 방문하는 모든 외국인들은 북한 정부의 안내원들이 한명씩 따라 붙는다. 이들 안내원들은 방문객들과 같은 호텔에서 머물며(물론 방은 다르다) 방문객들의 북한 체류 기간동안 항상 함께 움직인다.안내원들은 결코 위축돼 있거나 경직돼 있지 않았으며 마치 관광 가이드처럼 편안하고 친절했다.
오히려 북한을 처음 방문하는 기자의 마음을 읽기나 하듯 미주에서 오신 분들 중 어떤 분은 마치 북조선에 한번 들어오면 다시는 못 나가갈 것처럼 두려워하시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메다. 세월이 어떤 시대인데 그렇겠습네까라며 웃었다.
평양에서 가장 좋은 호텔로 꼽히는 고려호텔은 2개의 45층 건물로 구성된 500개 객실의 대형 호텔이었다. 주로 외국인들이 많이 이용하는 이 호텔은 식당과 커피숍, 생맥주집은 물론, 기념품 판매점과 당구대, 사진관, 책방 등 오락시설도 갖추고 있었으며 이 메일과 팩스, 국제전화도
사용할 수 있었다.이 메일은 호텔 직원을 통해 보낼 수 있었으며 요금은 250kb 당 2달러였다.
호텔을 비롯, 대부분의 관광지에서는 북한 원과 중국 위안, 유로, 미 달러 등 다양한 화폐 사용이 가능하다.호텔에서 시청할 수 있는 텔레비전의 채널은 모두 3개였으나 3개 채널이 동시에 방영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프로그램은 북한의 체제를 홍보하는 내용이었지만 가끔 외국에서 제작된 자연 관련 프로그램도 방영됐다.
김일성 주석의 생가인 만경대를 비롯, 평양의 관광지에서 일하고 있는 안내원 여성들은 상냥한 웃음으로 친절하게 방문객들을 대했다.북한의 국민들은 모두 김일성 주석의 얼굴이 새겨진 붉은색 뱃지를 왼쪽 가슴에 착용하고 다녔다. 안내원에 따르면 뱃지는 정부에서 발급하며 정부 외에 그 어떤 곳에서도 구입할 수 없다.
사흘간 평양에 체류하며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결코 침체돼 있지 않은 주민들의 표정이었다. 대동강 강변을 비롯, 곳곳에서 손을 잡고 웃으며 걷는 연인들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으며 거리에서 버스나 전차를 기다리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티없이 맑은 표정으로 놀이를 하는 어린이들의 모습 또한 인상적이었다.
물론 예외는 있겠지만 기자가 본 대부분의 평양 주민들은 북한의 체제 안에서 나름대로 만족하며 열심히 일하고 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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