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동서를 만났다. 시카고에서 시작한 그의 미국생활 35년만에 와보는 LA이다. 장성한 아들 넷을 대동하고 나타난 그녀는 남편을 여읜 지 2개월밖에 안된 슬픈 모습이었지만, 당당한 아들들로 인해 조금도 쓸쓸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큼직한 젊은 체구에 둘러싸인 중년 여인의 나약한 모습을 감싸는 든든함이 따뜻해 보였다.
성실하고 검소한 생활태도의 씩씩한 인격체로 키우기까지의 수고가 삶의 즐거운 과정이었다며 회상하는 동서의 조용한 모습 뒤에서, 긍정하며 미소짓는 고인의 잔영이 스쳐갔다.
예고 없이 맞는 죽음의 현실에서 살아있음의 불확실성을 새삼 절감할 때가 있다. 그리고 그 후유증으로 허무감에 시달리는 경우도 있다. 누구나 비껴갈 수 없이 겪는 일이면서도 애써 외면하고픈 사실이어서 준비 없이 당황하게 된다.
그래서인가 요즘 들어 죽음에 대비한 사고와 처리 문제 등에 많은 관심이 제기되고 있다. 낯선 과제가 아닌 삶의 연장으로.
얼마 전에 한 권사님의 소천 소식을 듣고 장례에 참석한 일이 있다. 평시에도 차분했던 분이었으나 돌아가시기 전 가족들을 불러 유품을 나누어주고, 목사님을 모시어 고별예배를 드린 후 애창하던 찬송가를 부르며 운명하였다고 한다.
두려운 미지의 세계가 아닌 소망의 확신으로 편안히 잠드신 것이었다.
“여태까지 수많은 장례 전후를 담당해 왔지만 이분처럼 침착하고 우아하게 죽음을 맞으시는 모습은 처음입니다.”
하관예배를 인도하신 H 목사님의 감격적인 발언이었다. 아름다운 마지막을 위해 훈련을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병상에서 투병중이거나 요양상태라면 가능한의 극기로, 기억에 남을 아름다운 종말을 고할 수가 있겠다. 그래서 유족에게 최소한의 위로를 건네기도 할 것이다. 허나 뜻하지 않은 사고나 필수적인 의미가 부여된 전투 중에 사망하는 막막함은 도리가 없다. 명예와 보상이 아쉬움을 달래줄 뿐이다.
삶을 감당치 못해 스스로 세상을 등지는 경우도 허다한데 그 극한상황에 이르기 전에 살아야 할 이유를 되찾지 못한 외로움이 가슴 저린다. 이러한 많은 상실은 남겨진 사람들께 깊은 상처가 될 것이다.
런던의 폭탄테러 소식에 또 한번 세상은 경악했다. 뉴욕의 9.11 상처가 아직도 거친 문신으로 남아있는 데 그 아픈 기억에 덧칠하는 사건이다. 올림픽 개최 도시 확정으로 한껏 기뻐했던 시민들의 축제분위기가 상극으로 뒤집힌 울분으로 이어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왜 무고한 인명이 손상되어야 하는지, 언제까지 이럴 건 지, 복잡한 정세와 해결의 아득함에 멍청해진다. 바르게 기본권을 지켰을 많은 생명의 존엄성이 짓밟혔음에 분노를 느끼며 애도한다.
“한 사람의 빈자리가 이렇게 큰 줄 몰랐어요” 잃으며 얻는다고 무심했던 일상의 작은 일들을 되새기며, 호흡하는 동안의 처신에 신중할 것임을 동서는 거듭 다짐했다.
빛이 있는 동안 반기며 그 혜택을 고루 누리도록 나누고 베푸는 여유를 가져야겠다. 찰나의 선택도 자유롭지 못한 인간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기를 노래한 윤동주 시인의 양심처럼 정말 후회 안 할 생애의 밑그림을 지니자. “내일 지구에 종말이 와도 오늘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의 말을 명심하며 살고 싶다.
이인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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