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수요일 오전 법원에 보고서를 제출하러 가는 도중 공영 라디오 방송 NPR에서 실황 중계하는 존 로버츠 대법원장 지명자에 대한 상원 법사위의 청문회를 듣게 되었다.
사람팔자 시간문제라는 말처럼 누구에게나 시기의 우연이 닥치는데 그것이 불행 쪽으로 그리 될 수도 있는가 하면 정반대일 수도 있다. 지금 현재 워싱턴 DC 소재 연방 항소법원 판사인 로버츠의 경우는 분명 후자 쪽이다.
아버지가 강철회사 중역으로 고생을 모르고 자란 그는 명문 사립학교를 나오고 하버드 대학 학부를 거쳐 하버드 법대를 졸업한 수재 중 수재란다. 법대 재학중에는 ‘하버드 로 리뷰’(Harvard Law Review)의 편집장이기도 했던 그는 최근 작고한 윌리엄 렌퀴스트 대법원장이 대법원 판사 시절 그의 법률 서기를 지냈다.
대학 시절부터 보수 쪽으로 기운 그가 당시 레이건 대통령의 백악관과 법무부 사이를 오가며 주로 대법원에 계류 중인 사건들에 대한 연구, 아니면 정책 입안에 있어서 보수 성향을 두드러지게 나타낸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것 이다.
그리고 그 후에는 대형 로펌 대법원 사건을 전담하는 전문가로 있었다가 그 위상에 있어서 연방 대법원 바로 다음 자리에 있는 DC 연방 항소법원의 판사로 발탁된 게 불과 2년 전이었다. 판사가 되기 전 30건의 대법원 사건을 변론하는 기록을 세우는 과정에 있어서 발군의 실력을 가졌으면서도 사람이 좋다는 평판을 쌓아올린 데다가 낙태를 합법화한 1973년의 로우 대 웨이드 사건이 잘못된 결정이라는 견해를 글에서 피력한 적이 있을 정도로 보수적이니까 부시의 대법원 판사 명단의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샌드라 데이 오코너 대법원 판사가 올 6월말 은퇴를 발표한 지 일주일 정도 후에 로버츠는 그의 후임 대법원 판사로 지명된다. 대법원 판사 인준 청문회를 위한 준비중 렌퀴스트 대법원장이 9월 초에 병사하자 48시간도 못 되어 로버츠는 대법원장 후임으로 지명되었으니까 그야말로 승승장구의 관운이라고 표현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조지 W. 부시가 43대 대통령인데 순풍에 돛을 단 것처럼 인준 청문회를 일사천리로 통과중인 로버츠는 17대 대법원장이 될 것은 불문가지일 것이다.
지금 50세인 그가 렌퀴스트처럼 80세에 죽는다 해도 30년은 로버츠 대법원장 시대로 전개될 것이기 때문에 미국 역사가 계속되는 한 사회 전체에 심오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리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청문회 중계를 듣다보니 로버츠가 상원 법사위원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에 있어서 핵심을 피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물론 민주당 쪽 의원들은 그가 낙태사건, 소수계 우대문제, 투표권을 포함한 기본권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를 캐내기 위해 그가 백악관과 법무부 변호사 시절부터 작성했던 법률 의견서들 중 부시 행정부가 공표한 것들을 두고 꼬치꼬치 캐물었다.
하지만 로버츠는 한결같이 대법원으로 올라올 소지가 있는 사건들에 대한 자기 견해를 밝히는 것은 판사로서 부적절한 일이라며 공손한 거절로 일관하는 바람에 에드워드 케네디와 조셉 바이든 등 상원의원들의 짜증스런 대꾸도 들어야 했다. 예기했던 것처럼 공화당 상원의원들은 로버츠를 두둔하고 칭찬하기에 여념이 없는 듯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에 의해 대법원장으로 임명된 얼 워렌이 공화당 행정부의 보수성향과는 정반대로 흑인들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일련의 판결을 내려 미국을 선진국 대열로 진입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데서 볼 수 있듯이 종신직인 대법원 판사가 꼭 임명권자의 정치성향을 지속시킨다는 공식은 없다.
민주당이나 진보층에서 로버츠에게 바라는 것은 그 점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 확실한 것은 만약 고어나 케리가 대통령이었다면 로버츠는 대법원장이 못 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남선우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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