뫼비우스의 띠
소설가 조세희는 한 때 ‘난쏘공’으로 더 잘 알려진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란 연작 소설에서, 소외 계층인 난쟁이 일가의 삶을 통해, 화려한 개발 뒤에 숨은 빈민들의 아픔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소설은 극화되어 1979년도에 초연되었으며, 80년에 좌파 연극으로 지목돼 공연 금지된 이후, 2007년도 중반, 27년만에 서울에서 재공연돼 화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인 수학교사는 학생들에게, 두 명의 굴뚝 청소를 하고 난 청소부 중에서, 얼굴이 깨끗한 청소부와 지저분한 청소부 중, 누가 얼굴을 씻을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상식적인 대답을 유도한 후, 학생들의 대답이 틀렸다고 말합니다.
수학교사는 ‘뫼비우스의 띠’를 통해, 무엇 하나만이 정답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이는 곧 ‘무엇 하나만이 정답이다’라는 흑백논리, 고정관념을 탈피하여, 학생들이 사물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의 눈을 가질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뫼비우스의 띠’란 독일의 수학자 뫼비우스(1790∼1869)가 발견한 마법의 띠 놀이를 말합니다. 종이를 직사각형의 긴 띠로 만들어, 중간쯤에서 한 번 비튼 채, 양끝을 서로 마주 붙입니다. 그리고 그 꼬인 띠의 어느 임의의 점에서 선을 계속 그어 나가면, 그 선은 돌고 돌아 처음 출발했던 선과 만나게 됩니다.
또한 보통의 띠는 한 쪽 면은 빨간색, 다른 쪽 면은 노란 색으로 칠할 수 있지만, 뫼비우스의 띠는 한 면을 따라 색칠해 가다 보면, 모두 한 가지 색으로만 칠해집니다.
그래서 뫼비우스의 띠는 안과 밖, 어느 하나도 절대가 될 수 없음을, 또한 ‘안’이고, ‘밖’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단순히 우리들의 착각일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인식의 전환을 요구합니다.
그렇지, 착각인 게지.
안이 있어 밖이 있고, 밖이 있어 안이 있는 게지. 긴 것이 있어 짧은 것이, 짧은 것이 있어 긴 것이 있는 게지. 유가 있어 무가 있고, 무가 있어 유가 있는 게지. 그렇지. 이것이 있어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어 이것이 있는 게지.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저것이 사라지면 이것도 사라지는 게지.
중국 전국시대 송나라의 철학자이며, 장자의 절친한 친구였던 혜시(기원전 380-310)의 역설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줍니다.
“지극히 큰 것은 밖이 없고, 지극히 작은 것은 안이 없다. 지극히 큰 것은 작은 것과 같고, 지극히 작은 것은 큰 것과 같다.”
또한 불교 선종의 절집에서 전해 내려오는, 인식전환을 위한 좋은 방편 예화가 있습니다. 제자와 그 스승의 문답입니다.
“스님, 우주의 크기는 얼마나 됩니까?”
“자네는 좁쌀의 크기를 아는가?”
“예.”
“허허, 좁쌀의 크기를 아는 놈이 어찌 우주의 크기는 모른다고 하는고.”
깨달음의 세계에는 크고 작음이 없습니다. 깨달음의 마음 안에서는 ‘크다 작다, 있다 없다’라는 분별은 무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마, 너와 나는, 이것과 저것은 둘이 아닌 불이인가? 불이이면 하나인가? 아니다. 불일불이(不一不二). 하나도 아니요, 둘도 아닌 것을. 다만, 다만 ‘비롯된’ 연기(緣起)인 고로 공(空)인 게지.
아니지, 아니야. 그렇지, 공도 공인 것을!
박 재 욱 (로메리카 불교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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