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연예계 한인개척자들 <1> 김 시스터스
60년대 라스베가스 누빈 ‘원조 한류’
할리웃 블러버드 명성의 거리에는 미국의 유명 연예인들의 이름을 새긴 보도블록들이 수없이 깔려 있다. 그리고 한 시대를 풍미한 쟁쟁한 인사들의 이름 속에는 ‘필립 안’(1978년 2월28일 73세를 일기로 타계)이란 낯익은 배우의 이름이 눈에 들어온다. 미 주류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한인의 위상을 드높인 선구자적인 인물이다. 얼굴도 피부색도, 언어도 다른 미국의 연예시장에서 그가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수많은 고난을 극복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요즘 한국에서 ‘한류’라는 말이 유행하지만, 한인들이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하던 1960-70년대에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이전 더더욱 힘들었던 시절 동북 아시아의 작은 나라 ‘한국’과 ‘한인사회’를 알리는 첨병이었던 이들이 있었다. 현재 생존해 있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그 역사를 되짚어 본다.
8군서 노래시작, 10대중반 낯선 땅 첫발
하루 8시간 노래연습 영어몰라 손짓발짓
남동생들 ‘김 브라더스’와 70·80년대 풍미
1959년 1월20일 LA 국제공항에 3명의 10대 한인여성 3명이 도착했다. 한국을 출발, 일본에서 프로펠러 비행기로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꼬박 사흘이 걸렸다. LA에서 하룻밤을 머문 그들은 차를 타고 사막을 달려 환락의 도시 라스베가스에 도착한다.
<라스베가스 진출 초기 김 시스터스가 한 TV방송에 출연, 한복을 입고 한국 민요를 열창하고 있다.>
그리고 2월3일 선더볼트 호텔에서 4주 계약으로 공연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의 뛰어난 재능이 곧바로 시내 전체 호텔로 번지면서 한달 150달러 조건으로 스타더스트 호텔이 이들과 장기 계약을 맺었다.
이후 이들의 명성은 하늘은 찔렀다. 비록 메인 무대가 아닌 그 옆 라운지에서의 공연이었지만 카지노를 찾았던 수많은 관광객들은 이들에게 매료돼 자리를 떠날 줄을 몰랐다. 다름 아닌 ‘김 시스터스’의 얘기다. 중장년층에게는 ‘목포의 눈물’을 부른 이난영씨(작고)의 딸들로 기억되기도 한다.
김숙자(67)·애자(1987년 작고)·민자(숙자·애자씨와는 사촌간)로 구성된 김 시스터스는 이미 한국을 떠나기 전 어머니의 충고에 따라 다양한 악기를 섭렵, 한 사람이 여러 악기를 다룰 수 있었다. 미국에 도착했을 때 이들의 나이가 숙자 17세, 민자 17세, 애자 15세였다.
스타더스트에서 이들의 임무는 카지노를 찾은 관광객들의 발을 붙잡아두는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카지노에 머물도록 해 주머니 속의 돈을 꺼내도록 하기 위해 이들의 시선을 붙잡아둘 뭔가가 필요했던 호텔측의 아이디어였다.
미국에 오기 전 미군부대에서 높은 인기를 얻은 것이 라스베가스 진출의 전기가 됐지만, 이들은 이 당시만 해도 영어는 한 마디도 못했다. 공연시간 한 시간동안 부르는 20여곡의 영어노래는 모두 외운 것들이었다.
오죽하면 닭고기를 먹기 위해 식당에서 닭 흉내까지 내야 했을까.
영어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인기가 올라가면서 푸른 눈을 가진 남성들의 데이트 신청이 쇄도했다. 하지만 세 자매는 한국을 떠나기 전 어머니로부터 절대 혼자 행동하지 말라는 엄명을 받은 터였다.
그래서 데이트 신청이 들어오면 “세 명이 함께 가면 가고, 아니면 못간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 “쓰리 고, 노 고”(Three go, No go)라고 말하기도 했다.
아무튼 김 시스터스는 봉급을 받으면 곧바로 상당 부분을 쪼개 한국에 보냈고, 매일 8시간 넘게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그리고 화씨 110도를 훨씬 넘는 무더운 여름철에 한복을 입고 시내를 누비고 다니며 자신들과 한국을 알렸다. 비록 한인사회와는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못했지만 ‘원조 한류’로서 이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셈이다.
먹는 것도 말이 아니었다. 한 번은 한국에서 어머니가 총각김치를 깡통에 담아 미국으로 보냈다. 그토록 먹고 싶었던 김치를 마침내 맛볼 수 있게 됐다는 기대와 흥분 속에 물건을 건네받기 위해 공항에 나갔건만, 오는 도중에 국물이 새면서 심한 악취를 풍기자 항공사 직원이 이를 버렸다는 얘기에 얼싸안고 울음을 터뜨린 적도 있었다.
피눈물나는 어린 세 자매의 노력은 조금씩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1959년 9월 당시로는 최고의 인기 TV쇼 프로그램이었던 ‘애드 설리번 쇼’에 출연(총 22회 출연)하는 기회를 얻었다. 김씨 자매는 그가 누군지도 모른 채 출연해 기량을 마음껏 뽐냈고, 시청자들로부터 큰 호응과 관심을 얻었다. 그리고 이 출연은 김 시스터스가 라스베가스에서 정상급 여성 보컬 그룹으로 부상하는 중요한 전기가 됐다.
15년에 걸친 라운지 공연 생활을 끝내고 데저트 인 호텔 메인쇼를 장식하기 시작했고, 전국 순회공연도 성사돼 전국적인 스타로 부상했다. 그 명성은 돈으로 이어져 호텔 공연에서는 주당 1만3,000달러를, 에드 설리번 쇼에서는 3분을 노래하고 1만5,000달러라는 당시로는 거액을 받았다.
한 유명잡지가 ‘초컬릿바에서 주급 1만3,000달러’란 제목으로 김 시스터스 특집을 만들 정도로 이들은 화제의 인물이었고, 매주 650만명의 구독자를 가진 ‘라이프’지도 이들의 활약상을 상세히 보도했다. 그리고 LA에서 방송되는 ‘할리웃 쇼’에도 출연했다.
비록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한인 인구가 적었지만, 이들의 등장은 한인사회의 자랑이었고 보람이었다.
1975년부터는 라스베가스 힐튼에서, 1980년대에는 현재의 해라스인 할러데이 카지노에서 공연을 펼쳤다. 그리고 기반을 잡은 뒤 숙자씨는 영일(한국서 찬양팀 활동중), 상호(LA거주), 태성(라스베가스 거주)씨 등 남동생을 불러 들여 ‘김 브라더스’란 이름으로 플라멩고 호텔에서 활동하게 만들었다.
주류시장의 높은 벽을 뚫고 김 시스터스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노래와 춤 실력, 그리고 다양한 악기를 동원한 버라이어티 쇼를 소화해 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이들의 성공은 다른 한국 가수들의 라스베가스 진출 문을 열어주었다, 윤복희씨 등이 주축이었던 코리안 키튼스, 그리고 패티 김씨 등이 공연을 하게 된다.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필립 안이 미 영화계의 한인 개척자였다면, 김 시스터스는 바로 대중 음악계에 ‘한류’를 알린 프론티어였다.
라스베가스에서 적어도 20여년 이상을 거주한 주민들은 지금도 ‘김 시스터스’를 기억하고 있다. 또 이들이 15년간 몸담았던 스타더스트 호텔의 역사를 담은 ‘스타더스트 예스터데이’에도 이들의 활약상이 담겨 있고, 네바다 주립대 도서관에서도 이들에 대한 자료가 비치돼 있는 것에서 당시 우리가 알지 못했던 세 한인 여성들의 위상을 실감할 수 있다.
<지금은 무얼하나>
나이 들면선 불협화음
뿔뿔이 흩어져 아쉬움
<인기절정이던 60년대 김시스터스. 왼쪽부터 숙자, 민자, 애자씨.>
이난영씨가 세 딸을 보컬그룹으로 키울 당시 멤버는 큰딸 영자, 둘째 딸 숙자, 셋째 딸 애자였다. 그러나 어느날 큰 딸의 키가 동생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자 외삼촌 이봉령의 딸인 민자로 대체했다. 그리고 미국에 오기 위해 성이 다른 민자를 이난영씨가 딸로 입양시켜 김씨 성을 갖도록 했다.
이난영씨는 세 자매에게 “미국에 가면 남자친구를 사귀지 말라”고 강조했다. 그룹이 깨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우려는 결국 현실로 나타났다.
성인이 된 뒤 이성과의 데이트를 하기 시작하면서 불협화음이 발생하기 시작했고, 리더였던 숙자씨의 권한도 흔들렸다. 이후 민자씨와 ‘김 시스터스’ 브랜드 소유권을 놓고 갈등이 벌어지기도 했다.
마지막까지 무대를 지켰던 숙자씨는 12년 전 자동차 사고로 부상을 입은 뒤 연예계를 은퇴하고, 현재 부동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숙자씨는 “모든 것을 새로 배우는 기쁨에 젖어 있다”면서 “바로 이웃에 사는 큰언니, 그리고 동생들과 자주 모인다”고 전했다.
애자씨는 두 번의 결혼에 실패하는 등 굴곡 많은 삶으로 도박에 빠지기도 했으며, 폐암에 걸리자 통증을 참지 못해 마약에도 손을 대는 등 힘겨운 투병 끝에 1987년 사망했다. 또 나중에 결별한 민자씨는 현재 남편을 따라 헝가리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숙자씨가 보는 요즘 ‘한류’에 대한 생각은 어떨까.
숙자씨는 “댄스와 랩 음악이 한국 젊은 가수들의 공통점”이라며 “이들이 미국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것을 개발하고, 한 계단씩 차분히 인내를 갖고 준비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다음주 월요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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